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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무용학자 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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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무용학자 정병호

입력
2011.07.2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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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4시. 학교 연구실에서 논문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정병호 선생의 장남 정지연 박사의 전화다. 잠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정 선생께서 방금 전 운명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는 3년 전부터 알츠하이머 병으로 투병 중이었다. 최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끝내 향년 84세로 타계하셨다.

선생은 2007년 필자가 운영하는 춤자료관 연낙재에 평생의 학문적 여정이 담겨 있는 무용자료 모두를 기증했다. 60~80년대 민속예능 현장답사 시절 선생이 직접 수집한 민속예능 사진과 필름, 최승희의 공연자료를 비롯 무용학 관련 문헌 등이 망라된 귀중한 자료들이다. 선생의 혼과 정신이 배여 있는 것들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얼마 전 정 선생의 옛 글과 사진을 모아 '한국 전통춤의 전승과 현장', '한국 전통춤의 원형과 재창조', 두 권의 저서를 연낙재무용학술총서로 발간했다. 한 달 전쯤 출판기념회를 겸해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조명하는 행사를 계획하고, 그 소식을 전하고자 선생님 댁을 방문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정 선생은 우리 춤의 원형 탐색과 학문적 체계화를 모색한 한국무용학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다. 1927년 전남 나주의 전형적인 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어려서부터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능가했다. 신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집안 내력 덕분에 선생은 일찍이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접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 광주극장에서 관람한 최승희의 '보살춤'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그날의 감동은 후일 최승희 평전으로 갈무리된다.

광복 직후에는 대학생 신분으로 함귀봉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입문해 조동화, 최창봉, 차범석, 정순영 등과 함께 현대무용과 교육무용을 체득했다. 이후 중앙대 교수, 문화재위원을 지내며 평생 동안 한국무용학의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데 전념했다. 또 아카데믹한 감성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평론활동을 펼쳐, 한국 춤의 예술적 진화를 견인하는데 기여한 점도 주목할 업적이다.

70년대 들어 문화계는 사실주의 양식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대신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우리 것'에 대한 재발견 작업이 화두로 떠오른다. 그 즈음 정 선생은 지방에 묻혀있던 전통예인들을 발굴해 서울무대에 소개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매방(살풀이춤⋅승무), 이동안(발탈), 김숙자(도살풀이춤), 한영숙(승무), 강선영(태평무), 하보경(밀양백중놀이), 박병천(진도씻김굿), 김금화(황해도배연신굿), 김석출(동해안별신굿), 이흥구(학연화대무) 등 오늘날 명무(名舞)로 평가받는 전통춤꾼 대부분 정 선생의 노력으로 인간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30년 전 전남 영광의 시골에 숨어있던 병신춤의 달인 공옥진의 일인창무극을 처음 발굴해 중앙무대에 소개한 이도 정 선생이다. 공옥진의 일인창무극은 2010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정 선생은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며 약 25종에 이르는 종목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산파역할을 하였다.

최승희 연구자로서의 업적 또한 돋보인다. 선생은 월북예술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단행된 80년대 후반부터 전설적 인물로만 기억되던 신무용가 최승희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학(學)'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했던 시절, 한국무용학의 지평을 연 개척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선생은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열정과 집념으로 한국무용학의 초석을 다진 '거목(巨木)'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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