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악마 같은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한국은 단일문화권 국가이며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한 것은 기분 나쁘고 끔찍스러운 일이다. 마치 한국사람들에게 다문화국가의 문제점을 잘 알아서 대처할 것과, 민족의 정체성을 해치는 사람들을 자기처럼 적극적으로 배척하라고 선동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가 한국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몰라도 '악마의 호감'은 한국인 누구에게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테러참극
브레이빅의 천인공노할 테러와 끔찍한 참극을 당한 노르웨이 사람들을 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우리 사회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국내의 외국인 거주자가 인구의 2.7%, 130만 명에 이르면서 다문화 포용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거나 경시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잠식하고 교육ㆍ의료 및 복지 혜택을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몫이 줄어든다는 피해의식이 커져가고 있다. 예를 들면 다문화가정에는 영ㆍ유아 보육료를 100% 지원하면서 동일한 상황의 내국인 서민층에는 전혀 지원이 없는 형평성과 역차별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살기가 어려워질수록 자연히 반감이 커져간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개별 활동을 해오던 반(反)다문화 단체들이 점점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하는 양상이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브레이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동정적으로 쓴 온라인의 글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의 정도를 짚어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계에 근본주의가 지배적이라는 점도 인종ㆍ종교 편견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걱정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반감을 가진 내국인들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면서 각종 차별과 설움을 당하는 외국인들의 불만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들이 필요해서 불러들여 놓고 이제 와서 자신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배척하는 식의 행동을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펴야 한다. 아울러, 그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도록 한국을 가르치거나 그들을 달라지게 하려고만 하지 말고 한국인들에게도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배우게 해야 한다. 서로 배우지 않는 일방통행식 소통은 위험하다. 무조건적인 시혜정책도 바람직하지 않다.
세 번째로,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할 점은 다문화국가로 이행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필연이라는 점이다. 이민자 유입 없이 경제발전에 성공했다는 자랑이나 단일문화 국가이므로 안전하다는 자부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어느 시대든 역사적으로 융성하고 강대했던 나라는 다민족ㆍ다문화 국가였다. 그런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른바 톨레랑스, 관용의 정신이었다.
'복지국가ㆍ평화국가' 노르웨이의 경우 이번에 비록 참극을 당했지만 다문화주의에 어느 나라보다 더 관용적이었다. 이런 나라들의 성공과 실패를 두루 살펴 새로운 다문화국가를 만들어간다는 큰 구도 아래 이민ㆍ복지 등 각종 정책을 그에 걸맞게 개발하고 시행해야 한다. 문과 마음을 닫고서는 세계화시대에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없고 생존할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노르웨이 사람들의 차분함과 성숙을 배워야 한다. 대참극 이후에 열린 오슬로 시내 추모집회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침묵의 메시지는 웅변보다 더 효과가 컸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슬픔을 표현하고 비극에 대처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3ㆍ11 일본 대지진 때 침착하고 질서 있게 행동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우리는 놀랐지만, 노르웨이 사람들도 일본인 못지않았다.
우는 문화도 이젠 달라져야
그러나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아이고땜을 놓는 호곡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놓아 통곡을 하고 넋두리를 하면서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부수고 항의해야만 슬픔과 억울함이 전달될 거라고 믿는 식이다. 그러나 우는 문화는 남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중요한 공존의 방식 중 하나이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