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어느 날 미국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대에 재학 중이던 두 명의 그리스 젊은이는 이렇게 의기투합했다. "우리가 언젠가 함께 조국을 이끌어 나가자."
기숙사 골방에서 오간 그저 그런 약속이 40년 후 현실이 될 줄은 둘 다 몰랐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그리스 총리와 제1야당인 신민주당의 안토니스 사마라스(60) 당수. 절친한 친구 사이지만 이들은 지금 정반대편에서 상대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다.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고 연금혜택을 줄이자는 파판드레우 총리에 맞서 사마라스 당수는 "긴축재정은 그리스를 망치는 길"이라며 줄기차게 총리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리스의 정치 라이벌들이 국가와 유럽연합(EU) 60년 역사의 최대 성과물인 유로화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둘의 인연은 10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엘리트의 요람인 아테네대에서 처음 만난 파판드레우와 사마라스는 유학생활도 함께하며 우정을 쌓았다. 군부 통치 아래 놓여 있던 조국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은 두 젊은이를 하나로 뭉치게 한 힘이었다.
하지만 성격과 태생은 판이했다. 히피문화를 동경하고 자유분방했던 파판드레우와 달리 사마라스는 사교성은 좋았으나 보수적인 원칙주의자였다. 또 파판드레우의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81년 그리스 최초의 좌파정권을 세워 복지제도와 각종 서민정책의 토대를 마련했다. 반면 사마라스는 민족주의 기질이 강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유명 작가였던 그의 증조할머니는 41년 그리스가 독일 나치의 침공을 받자 자결을 택할 정도였다.
때문에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찾아 왔을 때 이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는데 승리는 언제나 파판드레우의 몫이었다. 파판드레우 가문은 3대가 연속으로 총리를 배출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이에 반해 사마라스는 90년대 초 강경 대외노선을 표방하다 외무장관에서 해임된 뒤 11년 동안 야인으로 지내는 등 잦은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사마라스는 2004년 집권당 당수가 된 파판드레우가 입각을 권하자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스 국민은 사마라스 당수 편이지만 국제사회는 파판드레우 총리를 호의적으로 본다. 지난주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정상들은 그리스에 1,590억유로를 지원하는 2차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합의했으나 지원의 대전제는 그리스의 정치적 안정이었다. 유로존 입장에선 구제금융을 극렬 반대하는 사마라스가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은 "외부의 도움이 절실한데도 사마라스는 오히려 '감세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성장을 견인하자'는 비현실적 해법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WSJ는 "6월 초 파판드레우 총리가 제안한 거국내각 구성이 무산되면서 둘 사이는 더욱 틀어졌다"며 "그리스에 대한 유로존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재원 마련이 아니라 친구이자 정적인 두 정치 거물"이라고 전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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