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을 향한 금융당국의 행보가 거침없다. 당국이 겉으로는 시장상황과 자율을 강조하지만, 업계에선 사실상 대형사간 합병과 증자를 압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업계는 대형 투자은행(IB) 탄생을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27일 입법 예고돼 내년 6월에나 발효될 예정인데도, 시행령을 들어 대형 IB의 자격조건을 자기자본 3조원 이상으로 못박은 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마디로 선후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홍영만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은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대형 증권사들의 평균 자기자본이 2조원대 후반이기 때문에 10% 내외 증자를 단행하면 3조원을 맞출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대우, 삼성, 현대, 우리투자, 한국투자 등 5개 증권사가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조차 헤지펀드 시장이 얼마나 돈이 될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수천 억원을 증자하는 건 무리라는 입장이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지금도 증권사 콜(금융사간 단기자금 거래)차입 거래 제한조치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데, 능력을 벗어나는 증자 압박까지 받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게다가 자기자본금 1조원대 후반인 신한금융투자ㆍ대신증권 등도 IB 경쟁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선두 다툼이 벌어질 경우 무려 4조원 정도를 시장에서 조달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금융당국이 국내 IB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대형화만 밀어붙인다는 우려도 나온다. 증권사 관계자는 "대형 IB의 탄생보다는 수수료를 거의 원가 수준으로 받아서라도 계약을 따내려는 IB간 출혈경쟁 문제를 보완하는 조치들이 더 시급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대형사간 인수ㆍ합병(M&A) 얘기도 흘러나온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이날 "리딩 증권사간 합병이 바람직하고 지원하겠다. 다만 당국이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 관계자도 "대형화를 위한 M&A가 있다면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선 "2007년 이후 대형화를 위한 자발적 M&A는 전무했다", "메가뱅크도 무산됐다. 국회가 시스템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는 논리로 대형 IB 출현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크다"라는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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