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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 곳] <1>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홍대 앞 선술집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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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 곳] <1>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홍대 앞 선술집 거리

입력
2011.07.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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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돌아와 앉은 술잔 앞엔 그의 마지막 독백만…

어떤 아픔은 발산하지 않고 수렴한다. '온몸을 흔드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닌 제 조용한 울음'인 줄을 까맣게 모르는 갈대처럼(신경림의 시 '갈대' 중), 어떤 아픔은 안으로만 수렴하다 종내 내파(內破)한다. 돌아선 연인, 그 그림자마저 거대한 흉기처럼 느껴지던 때는 누구에게나 있다. 사랑에는 정의(正義)가 없다고,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고 흐느낄 때, 이 노래는 어쩌면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두터운 기억의 각질을 뚫고 현현하는 한때의 고통.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과 마주치는 순간, 듣는 이의 내면에는, 흡사 파블로프의 개처럼, 작은 파랑이 인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등단시인 류근(45)이 김광석의 연락을 받은 것은 군 제대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류근의 현실은 참혹했다. 집안은 완전히 망해 양말 한 짝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고, 대학(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복학마저도 암담했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해결하던 때, 전인권의 카페에서 기획실장을 하던 학교 후배가 노래 가사를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시인은 시가 쓰고 싶었다. 시 아닌 것은 하찮게 보일 만큼 시에 대한 열망으로 달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시는 잘 써지지 않았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여기까지 쓰고 나니 막다른 골목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노래 가사로나 만들어보자.' 마음을 바꿔 먹으니 이상하게도 펜대가 술술 나갔다. 그날 하룻밤에 몰아 쓴 가사가 스물 아홉 곡. 이 가사들은 당시 운동권 가수였던 윤선애의 새 대중앨범에 쓸 작정이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축어적 의미이기도 했지만, 1980년대를 살아간 청춘들의 아린 시대정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음반사가 망해 음반 제작은 무산됐고, 오선지에 안착하지 못한 가사들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가수 김광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떠돌아 다니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봤는데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같이 작업합시다." 김광석은 이미 당대 최고의 가객이었다. 게다가 싱어송라이터인 김광석이 남의 가사에 직접 곡을 붙이기는 매우 드문 일. 류근은 일면 감격했다. 그렇게 그는 김광석의 작업실이 있던 홍대 앞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너무 아픈…'은 지금의 형태로 수정됐다. 작사료는 50만원. 1994년이었다.

빗발이 추억처럼 흩날리는, 홍대 앞 술집거리

류근은 군 복무 시절 사귀던 연인을 선배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다. 최전방 GOP 근무를 하면서 아침이면 매일 '오늘은 죽어야지' 결심했다가 저녁 노을이 밀려오면 '하루만 더 살아보자' 마음을 바꾸기를 몇 달이나 계속할 만큼 괴로운 시간이었다. '너무 아픈…'에는 이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최전방의 을씨년스러운 정경이 이 곡의 노랫말을 잉태한 배경이라면, 이 노래의 실질적 제조지는 김광석과 류근이 함께 작업하며 몰려 다녔던 홍대 앞 단골 술집과 거리들이다. "김광석씨가 살던 홍대 앞 건물 한 층이 작업실이었어요. 아주 널따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노래 연습도 하고 곡도 쓰고 그랬죠. 가보면 친했던 가수 박학기씨가 자주 와 있었고...."

지금의 홍대 앞에서 그때의 풍경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들이 어울려 다니던 술집들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범박한 유행이 범람하고 있을 뿐이다. 류근은 그런 홍대 앞의 지금을 "참 곤란한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울림과 떨림… 하모니카와 김광석

김광석 노래만큼 다시 불려진 노래도 많지 않지만, 그의 노래만큼 김광석 아니면 표현해 낼 수 없는 노래들도 흔치 않다.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통해 육화됐을 때에야 비로소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노래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전인적으로 노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을 관통해 간 아픔들을 육화해 부르기 때문에 그의 노래는 언제나 입체적이다. 그가 노래로 변환해 뱉어내는 아픔들은 보는 이에게 그의 슬픔이 진짜라는 믿음을 준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그의 노래 앞에 물색없이 자신의 슬픔을 꺼내놓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기 전 군 복무 중 사망한 형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러곤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고선 나직이 말한다. "아니라고 한다고 아닌가요. 기지요." 관객들은 웃지만 웃음은 이내 아득한 숨죽임으로, 흐느낌막?잦아든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는 '너무 아픈…'을 오늘의 명작으로 만든 두 가지 요소로 역설적 가사와 울림의 창법을 꼽았다. 감정을 씹어 삼키는 이런 정서의 가사는 '시인과 촌장', 이영훈과 이문세 콤비가 토대를 놓은 1980년대 후반 이래 김광석의 이 노래에서 절정에 달했다는 게 김작가의 분석. 여기에 바이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김광석의 창법이 흑인음악이나 R&B 음악과는 다른, 마치 울음을 참는 듯한 떨림으로 아픔의 정서를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김작가는 "이 곡에서 김광석은 폭발적 가창력을 일절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노래인데도 마치 편지를 읽어주는 듯한 독백 코드를 구현했다"며 "절제미의 극치를 추구한 명곡"이라고 평가했다.

김광석 음악에서 최고의 악기는 그의 목소리라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김광석 자체가 단단한 울림통을 가진 하나의 악기이며, 하모니카는 그의 확장된 신체다. 김광석과 하모니카는 제 울음을 삼키며 떨림으로 노래한다는 점에서 지독히도 닮았다. 김광석의 애절한 포크록에서 미니멀리즘이 감지되는 것은 통기타와 하모니카만 사용한 단출한 편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몸통을 울려 그 떨림을 내뱉는 절제의 창법에도 힘입은 바 크다. 도처에 널린 통속적인 감정들을 노래할 때도 격조와 깊이가 구현되는 것. 행진곡 풍의 흥겹고 희망적인 노래를 부를 때조차 처절한 슬픔의 기미가 느껴지는 것. 오로지 김광석만이 쓸 수 있는 김광석이라는 악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아끼는 노래", 그의 마지막 노래

두 살 위의 김광석은 류근에게 "나는 이 노래가 너무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내가 요새 밀고 있는 곡이니까 얼른 저작권협회에 가입하라"는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김광석의 마지막 정규앨범인 4집(1994)에 수록된 이 곡은 그의 생애 최후의 음반으로 남은 '다시 부르기 2'(1995)에도 실렸다. '다시 부르기 2'는 김광석이 추린 한국 모던포크의 최고 명곡들을 재해석한 음반으로 이중 자신의 곡은 단 두 곡만 수록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준흠은 모던하게 다시 편곡된 이 앨범 속 '너무 아픈…'이 김광석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너무 아끼는 곡이어서였을까. '너무 아픈…'은 김광석이 생전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이 노래를 라이브로 부르고 몇 시간 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류근은 김광석과 여러 곡의 새 노래를 작업하고 있었다. 충격과 허망함 속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서른 셋의 김광석은 그렇게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너무 아픈…'은 시인 류근의 처음이자 마지막 노랫말이 되었다.

그대 보내고 멀리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김광석의 자살은 그와 동시대를 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자 상처였지만, 류근에게는 각별했다. 젊은 시인은 취중 그의 부고를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맹렬하게 음반 작업을 하던 사람이 왜 그랬을까. 마지막 앨범 타이틀곡이 '일어나'였는데, 자꾸만 무릎이 꺾일 것 같아 자기주문을 걸었던 걸까. 류근은 수도 없이 생각했다. 까닭 없는 공범의식에도 시달렸다. 왜 하필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불렀을까, 혹시 이 노랫말이 어떤 부정적 힘으로 작용한 건 아닐까, 그를 더 큰 슬픔으로 몰고 갔던 것 아닐까, 자책도 여러 번 했다. 어쩌면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사람의 비애, 아니 공포였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김광석 사후 류근은 등단시인의 이력 덕분에 대기업 홍보실에 취직했다.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동안 시와는 서서히 멀어졌다. 부도를 코앞에 둔 기업의 '견실한 성장세' 보도자료를 쓰면서는 많이 괴로웠다. "시를 배워 거짓말 하는 이 짓을 더는 못하겠다"고 돌연히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게 1997년. 5개월 후 외환위기(IMF 사태)가 강타한 고국으로 돌아와 마루야마 겐지처럼 살고자 횡성으로 귀농, 고추농사를 지었다. 한 달에 50만원만 벌자 했는데, 연간 총 매출액이 40만원이었다.

인생은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반전한다. 농사 실패 후 실직 동료와 '무심코' 시작한 국내 최초 휴대폰 벨소리 다운로드 사업이 최단기간 코스닥 상장 기록을 세우며 소위 대박을 냈다. 케이블TV 대표 등 줄줄이 CEO 직함을 달고 살기를 8년. 하지만 무섭도록 돈이 벌리던 이 8년이 그에겐 고립의 섬에 갇힌 지옥이었다. 다 정리하고 이제 다시 시의 본업으로 돌아와 등단 18년 만인 지난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시집 을 냈다. 그리고 곡을 만든 지 17년 만인 올 1월, 김광석의 '유언'대로 저작권협회에도 가입했다. 8,000원이나 벌까 싶었는데, 어떤 달에는 60만원도 들어온단다.

다시 전업시인이 된 류근은 요즘 노래가 얼마나 힘이 센지 절감하고 있다. 지금의 30, 40대 중 김광석의 노래를 어느 한 갈피, 인생의 BGM으로 갖지 않은 이가 있을까. 김광석은 제 업인 노래로 무수한 타인들의 삶에, 그들의 결정적 혹은 절망적 순간에 개입했다. 그 개입에, 류근은 공범이었다. 그것은 시업만큼이나 그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끊이지 않는 김광석 추모 열기

요절한 예술가들은 죽음으로 제 작품에 신화적 아우라를 두른다. 그 아우라에 매혹된 이들이 바치는 추모와 기림이야말로 요절한 예술가가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축복이지만, 김광석만큼 이 축복을 넉넉히 받은 예술가도 드물다. 그것은 아마 그가 생전 이룩한 음악적 성취와 대중적 성공 때문일 터.

올해 김광석 15주기를 맞아 후배 뮤지션 11팀이 모여 만든 헌정앨범 '김광석 다시 듣기'가 최근 발매됐다. CJ E&M이 '명불허전'이라는 타이틀로 처음 선보이는 이 앨범에는 호란이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이바디가 부른 '사랑이라는 이유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인기 듀오 10㎝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아트 오브 파티스의 보컬 김바다가 부른 '사랑했지만'이 실렸다. 서바이벌 오디션 '수퍼스타 K'출신의 김지수도 '흐린 가을에 편지를 써'로 목소리를 보탰다. 담담하게 절창 했던 김광석의 곡들을 각각의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불렀다. 펑크록과 레게로 변주된 곡들도 있다. '다시 듣기'는 그 자신 '리메이크의 선구자'였던 김광석의 앨범 제목 '다시 부르기'에 대한 후배들의 오마주다.

그 이전에도 김광석 노래는 꾸준히 다시 불렸다. 록가수 김경호가 부른 '사랑했지만', 힙합 듀오 리쌍의 '변해가네', 포크가수 양현경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 목록은 끝이 없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광석 노래를 다시 불러 크게 사랑 받은 이는 거의 없다. 숨겨진 노래들을 찾아 명곡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리메이크의 정의를 다시 썼던 김광석. 정작 그런 그의 노래들을 어떤 가수도 그만큼 부르지 못했다는 것은 김광석이 얼마나 한국 대중음악사에 소중한 예술가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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