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푸어스(S&P)와 무디스는 지난 2001년 영국 최대통신사인 브리티시텔레콤(BT)과 독일 도이치텔레콤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낮췄다. 이유는 양 사 모두 40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부채 때문이었다. 두 회사는 2000년 영국과 독일 정부가 실시한 주파수 경매에서 과도한 입찰가를 써내면서 이렇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됐다.
#2. 이탈리아 통신업체인 IPSE2000은 2001년 주파수 경매 때 10억 유로를 내고 낙찰받은 주파수를 2006년에 반납했다. 입찰에서 너무 많은 출혈을 한 탓에 회사 자체가 경영난에 빠진 것이다. 결국 해당 주파수는 돌려받은 이탈리아 정부는 2009년 재경매를 했는데, 원래 낙찰가보다 훨씬 못 미치는 2억6,000만 유로에 낙찰됐다. IPSE2000의 실패를 목격한 통신사들이 무리한 금액을 쓰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두 번의 주파수 경매를 통해 돈을 번 곳은 이탈리아 정부뿐이었다.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의 사례는 세계 통신업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자의 저주' 케이스다. 어떻게든 주파수를 따내기 위해 비싼 값을 써냈지만, 결국 과도한 가격지불 때문에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투자유치에 실패해 경영난에 처하는 '부메랑'효과가 생긴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유럽 방식의 주파수 경매를 추진하고 있어, 똑같이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6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방송통신위원회는 4세대 이동통신인 롱텀에볼루션(LTE) 서비스를 위해 이동통신사들을 상대로 다음달 ▦800㎒ ▦1.8㎓ ▦2.1㎓ 등 3가지 주파수를 경매에 내놓으며, 이에 앞서 28일부터 신청서를 받는다.
주파수 경매란 정부에서 국가재산인 주파수를 경매방식을 통해 통신업체에게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 주파수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처럼 전파가 다니는 통로이기 때문에, 통신사들로선 주파수를 받지 못하면 서비스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3가지 주파수 가운데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1.8㎓다. 유럽 20개 업체, 미국과 아시아 5개 업체 등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통신사들이 이미 LTE용 주파수로 1.8㎓를 선택한 터라, 4세대 이동통신에서는 황금 주파수로 통한다. LG유플러스에는 2.1㎓가 사실상 배정되어 있기 때문에, 1.8㎓를 차지하려는 경쟁은 사실상 SK텔레콤과 KT의 싸움이다.
문제는 경매 방식이다. 주파수 경매는 높은 값은 써내는 쪽이 승리하는 일반 입찰과 달리, 경쟁적으로 값을 높여가는 말 그대로 '옥션'처럼 이뤄진다. 최저 입찰가를 정한 뒤 더 이상 높은 가격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 경매를 진행하는 이른바 '동시오름'입찰방식이다.
최저 입찰가는 ▦800㎒의 경우 2,160억원 ▦1.8㎓와 2.1㎓는 각각 4,455억 원이다. 하지만 통신사로선 어떤 값을 지불하더라도 주파수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경매를 통해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입찰가 경쟁이 7,000억 원대 이상까지 치솟을 수 있으며, 과열되면 조(兆) 단위를 넘어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KT와 SK텔레콤 모두 1.8㎓를 무조건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과도한 가격경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면서 "자칫 영국이나 독일처럼 승자의 저주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영국이나 독일의 주파수 경매 때 가격경쟁이 과열되면서 서로 높은 가격을 계속 부르는 호가가 150라운드 이상 계속된 것으로 안다"면서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경매주체인 방통위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경매를 통해 사실상 주파수장사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방통위 관계자는 "최고 입찰가를 써서 밀봉해 제출하는 방식이 더 불확실성이 크다"고 말했다. '승자의 저주'우려에 대해서도 "SK텔레콤과 KT 모두 LTE용 주파수를 이미 확보해놓고 추가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무리한 금액을 써내며 입찰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동시오름 방식에 대한 재고, 나아가 주파수 경매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LTE는 아직 시장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주파수비용을 과도하게 지불하면 정작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서비스를 하기 힘들어 지고 요금인하는 더더욱 멀어진다"고 말했다. 입찰 가격에 상한선을 두거나 입찰 횟수를 제한하는 조치로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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