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동네인 서촌은 조선시대 중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그 시절에는 청계천 윗쪽이라 해서 '웃대'라고 불렸다. 양반과 평민 사이 중간 계층인 중인은 역관, 의관, 율관, 음양관, 산관, 화원 등 전문직에 종사했다. 요즘으로 치면 통역사, 의사, 변호사, 천문학자, 수학자, 화가다. 이들은 전문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예술과 문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반상의 구별이 엄하던 때라 고위 관직에는 나갈 수 없었다.
중인들의 문화적 역량은 조선 후기 웃대 시사(詩社)를 통해 만개했다. 시사는 시를 짓는 동호인 모임이다. 중인들의 시사는 서울에만 있던 것이고, 중인의 존재 또한 서울만의 특징이었다. 정조 연간인 1786년 규장각 서리를 중심으로 결성돼 30년간 이어진 옥계시사(일명 '송석원시사')는 중인 시사의 절정이다. 옥계는 인왕산 옆 옥류동을 흐르던 옥류계곡. 옥계시사의 맹주였던 천수경은 서당 훈장이었다. 동인들은 이 곳에 있던 그의 집, 송석원에서 자주 모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옥계시사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중인들의 웃대 문화를 조명하는 전시를 26일 시작했다. 옥계시사가 펴낸 시집 등 옛문헌, 웃대의 위치와 풍경을 보여주는 옛지도와 그림, 중인들의 신분과 직업 세계를 보여주는 각종 기록과 유물 등을 한데 모았다.
<옥계십이승첩> 은 그림과 글로 옥계시사의 멋스런 풍취를 알려준다. 그들은 봄이면 산에 올라 꽃을 구경하고, 한여름 흐르는 물에 갓끈을 씻으며 더위를 잊고, 늦가을 산사에서 그윽한 약속을 하고, 한겨울 매화나무 아래 술자리를 가졌다. 언제나 시가 함께했다. 시를 잘 지어 3회 연속 장원을 하면 술을 한 턱 내고, 내리 꼴찌를 하면 벌주를 내어 대접했다. 백일장도 열었다. 백지에 글재주를 겨룬다 해서 '백전(白戰)'이라 했던 옥계시사의 백일장은 중인들 수 백명이 참가하는 잔치였다. 옥계십이승첩>
옥계시사 동인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웃대의 왈짜였던 호고재 김낙서, 술집 심부름꾼으로 입에 풀칠을 한 왕태 등 별난 이력의 인물들이 시문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들의 시는 서울의 풍정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신분의 한계에 울분을 토하거나 피폐한 민생을 고발하는 것도 있다. 경아전이었던 정래교는 '서울 구석에서 머리 숙이고 살며 아전 노릇 하기가 너무 힘들더라' 읊었다. 또 다른 시 '화분에 심어진 국화'에서는 '들판에 핀 국화 또한 오상의 절개가 있지 아니한가'라며, 화분의 국화 같은 양반보다 중인인 자신이 못날 게 없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중인들의 통청운동 사료도 소개한다. 고위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운동이다. 서얼들의 통청운동에 자극을 받은 중인들은 철종 연간인 1851년 사발통문을 돌리고 돈을 모아 1,872명의 연명 상소를 올렸다.
옥계시사는 1818년 좌장 천수경이 죽은 뒤 활동이 뜸했다가 남은 동인들의 또 다른 시사로 이어졌다. 웃대에서 만개한 중인들의 시사는 개항 직후인 19세기 후반 청계천 광교에서 활동한 육교시사를 끝으로 맥이 끊겼다. 육교시사 중인들은 개화와 선진 문화 유입에 앞장섰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도 육교시사 멤버였다.
지금의 서촌에서 웃대 시사의 풍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서울에서 꽃피었던 조선 중인 문화의 높은 수준과 근사한 풍모를 이번 전시에서 살필 수 있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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