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아만 고양이처럼/ 도사린 뒤꼍에// 장주발 깨뜨리고/꾸중 들은 누나// 담벼락 붙잡고/ 쨀곰쨀곰/ 우는데// 헤죽헤죽 웃는/ 별들 사이로/ 비쭉 내민/ 조각달.'('조각달' 전문)
동화 작가 권정생 선생이 2007년 작고한 뒤 지인들이 모여 경북 안동 조탑마을 빌뱅이 언덕의 권 선생 흙집을 정리하던 때였다. 세간과 유품을 정리하던 이들의 눈에 책 모양의 두툼한 원고 묶음이 들어온다. 살짝 건드려도 바스러질 것 같은 빛바랜 낡은 책 앞장에는 <동시 삼베 치마 제1집> 이라는 제목이 써 있었고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자 그림도 들어 있었다. 동시>
세상에 발표된 적이 없는 권 선생의 동시집이었다. 98편의 동시를 담은 이 시집이 권 선생이 붙인 그 이름과 그가 손으로 쓰고 그려 넣은 그 편집 그대로 문학동네에서 <동시 삼베 치마> 라는 양장본 동시집으로 25일 출간됐다. 동시>
<강아지똥> <몽실 언니> 등 동화로만 널리 알려져 있는 그도 실은 1987년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이라는 시집 한 권을 출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집 <삼베 치마> 는 세상에 빛을 본 경위 못지않게 그 존재가 매우 특별한 시집이다. 10대 때 써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평생 고이 간직해온 이를 테면 권정생 문학의 뿌리 같은 작품들인데다 동시 하나하나의 완성도와 작품성이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삼베> 어머니> 몽실> 강아지똥>
권 선생은 원고 묶음에 '권정생 지음'이라고 시의 주인을 밝히고 9부 각 장마다 제목을 쓰고 장 첫 페이지에는 색연필로 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그리고 풀로 붙여 책처럼 만들었다. 동시집을 묶은 시점도 원고 말미에 '1964년 1월 10일'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다. 아동문학가 권정생을 세상에 알린 <강아지똥> 보다 5년 앞선 시기이고 선생이 27세 때이다. 강아지똥>
그가 동시를 쓴 때는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가족과도 헤어졌다 모이고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이별하는, 그래서 감정의 굴곡이 심할 때였다. 그런 사정들을 갈무리해서 선생은 시집 첫 머리에 참 다정하게도 '열다섯 전후의 어릴 적 억이랑 주야랑 내 이웃들 재미있게 여기다 적었'다며 '슬픈 일 기쁜 일 많았'다고 썼다.
시집은 전편을 통해 그런 다사다난한 시기의 시골생활과 풍광, 학교 동무들과의 어울림을 그리고 있다. '골목길에 우물이/ 혼자 있다// 엄마가 퍼 간다/ 할매가 퍼 간다// 순이가 퍼 간다/ 돌이가 퍼 간다// 우물은 혼자서/ 물만 만든다'('우물' 일부)처럼 동시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봄이 봄이 또 온다/ 방실방실 웃으며/ 남북통일 됐냐고/ 금수강산 와 본다'('봄' 일부)처럼 사회의식에 눈 뜨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이는 작품도 있다.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건 시집간 누나 이야기를 다룬 '2부 꽃가마'. 일 나가는 엄마를 따라 나서는데 응석부리는 나를 '달랑 업고' 제일 맛있을 듯한 살구를 따 주던 누나는 '재 너머로' 시집을 갔다. 시집가기 전날 밤 '꽃주머니랑/ 종이배랑/ 만들어 주며/ 찔끔찔끔' 울었다. '나랑 살잖고 혼자 갔기 때매/ 나 없이도 누난 좋아 갔기 때매' 우리 동네는 '양반 동네'고 재 너머 동네는 '개 코딱지 동네'라고 욕 하는 게 어린 마음이다. 한국 동시문학계의 뜻하지 않은 수확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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