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2011' 기자회견장. 프랑스 여성 감독 클레어 드니는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35럼'(2008)과 '백인의 것'(2009) 등을 통해 제국주의의 그늘을 들춰온, 자존감 강한 감독의 개성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다. 붉게 물든 얼굴은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때문이라고 여겼다.
근거 약한 추측은 곧 무너졌다. 기자회견 말미에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숙취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회견장을 찾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술기운이 여전히 어린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다고도 했다. "한국의 A감독이 저녁만 먹자고 해서 호텔을 나섰는데 결국 꼬임에 빠져 날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드니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한국영화 '하하하'에 이 부문 대상을 수여했던 인물이다.
지난 5월 사진전 '이사벨 위페르: 위대한 그녀' 개막과 출연작 '코타카바나'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을 찾은 프랑스 명배우 이사벨 위페르는 바쁜 일정 중에도 하룻밤 시간을 내 A감독을 만났다. "새벽까지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는 게 영화계의 전언. 대작을 하며 마음이 통했을까. 세계 3대 영화제(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의 최우수여자배우상 트로피를 다 안아 본 위페르는 국내에서 촬영하고 있는 A감독의 신작에 출연 중이다. 위페르는 5월 방한 중 인터뷰를 하며 "한국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그의 바람이 일사천리로 이뤄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술을 캐스팅과 인간 관계 형성에 활용하는 A감독의 능력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평소 안면이 있는 배우에게 밤중 기습 전화를 해 전격적으로 캐스팅을 해결하는 방법도 다른 감독이 흉내내기 쉽지 않은 A감독의 비책이다. "쉬는 날까지 미리 파악하고, 출연료 등에 민감한 매니저를 거치지도 않으니 꼼짝없이 '네 저 시간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A감독 영화에 출연한 한 배우의 말이다.
A감독의 행보를 놓고 좀 비굴하다는 의견이 있을 만도 하고, 영화감독의 고단한 직업세계가 엿보인다는 동정론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영화계 사람들은 "그는 참 행복한 영화인"이라고 입을 모아 부러워한다. 국내 감독들 중 해외 유명 영화인을 어렵지 않게 만나고 국내 배우들과 밤 늦게 직접 통화할 감독이 얼마나 되겠냐는 것이다. 많은 감독들의 시샘을 새삼 확인하고 싶은 듯 A감독은 위페르 출연 영화 외에도 올해 한 편의 영화를 더 찍을 생각이다. A감독이 누구냐고? '북촌방향' 개봉을 앞둔 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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