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이제 부자 나라가 됐나 보네요." 김연아가 지난해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아사다 마오를 물리치고 '피겨 여왕'으로 등극했을 때, 알고 지내던 중년의 일본인에게서 들은 말이다. 김연아의 우승에 기분이 한참 좋았던 참이라 그 말에 약간은 김이 새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부자 나라가 됐고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도 먼저 우승한 것이 사실이다. 산의 정상에 먼저 오른 사람이 "나 거기 올라가봤어"라고 하는 것과 같았던 그의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김연아가 활약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그 일본인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렇다. 전통적으로 선진국인 유럽과 북미, 일본에서만 열렸던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은 한국이 부자 나라가 됐다는 것을 세계가 확인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국가 전체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있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체험에 비추어보면 평창올림픽 이후 한국은 지금보다 더 부자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 나라가 되면 그에 맞춰 치러야 할 대가도 함께 따라온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무연사회'(無緣社會)란 말이 유행했다. 돈이 없어 학연, 지연, 혈연 등 모든 연(緣)이 끊어져 홀로 고독사(孤獨死)하는 사람의 수가 한 해에 무려 3만 2,000여명에 달한다는 내용의 NHK 다큐멘터리가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고 기업에 의존했던 복지 모델이 붕괴되면서 가난해진 빈곤 노인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 모든 것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저출산 고령화도 따지고 보면 부자 나라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부자 나라가 되는 것은 자본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짜였던 물건이나 서비스를 얻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가난했던 시절, 젊은이들은 돈 하나 없이 전국을 일주하는 무전여행을 했다. 물은 어디 가나 공짜였고, 이사를 해도 주변에서 도와줘서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은 돈이 없으면 얻을 수가 없다.
일본이 무연사회가 된 것은 모든 것을 돈으로 가늠하는 화폐화가 매우 깊게 진행된 부자 나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부자나라에서는 사람 관계도 돈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미국 예일대 교수로 있는 중국인 천즈우는 중국의 전통적인 효(孝)를 금융의 한 수단으로 해석한다. 젊을 때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투자해 키워놓으면 자식들이 노부모를 봉양함으로써 그것을 되갚는데, 효는 이를 강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자본주의 시대가 됐으니 아들 집 사는데 퇴직금을 보태지 말고, 금융기관에 연금을 들라고 한다. 아들과 부모의 인간적인 관계에 의지하지 말고, 자본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 매정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돈이 사람 관계까지 대체해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해 이제 막 자본주의의 맛을 보기 시작한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부자 나라가 되면 동계올림픽 같은 좋은 일도 있지만, 무연사회와 같은 후유증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눈 앞에 뻔히 보이는 일이다.
남경욱 선임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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