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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테러/ 수줍던 소년, 걸프전·세르비아 공습 등 보며 반이슬람 괴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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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테러/ 수줍던 소년, 걸프전·세르비아 공습 등 보며 반이슬람 괴물로

입력
2011.07.2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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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이기 보다 희생자로 비치기를 원했던 테러리스트.

노르웨이 연쇄테러 용의자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의 삶은 93명의 인명을 앗아간 살인마치곤 지극히 평범했다. 이렇다 할 성장통을 앓았다거나 반이슬람주의자로 변모하기까지 영향을 준 외부의 자극도 없었다. 그는 온라인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깨우치면서 조금씩, 조용히 광기를 쌓아갔다.

브레이빅이 정치적 자각을 한 계기는 1990년 발발한 1차 걸프전쟁이었다. 그는 '2083: 유럽독립선언'에서 "그 때까지만 해도 정치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무슬림 친구가 미군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이라크를 찬양하는 것을 보고 서구문화에 대한 배려심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다.

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세르비아 공습은 그가 '이슬람은 악'이란 확신을 갖게 한 전환점이었다. 세르비아의 탄압에도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무슬림이 살아남자 그는 평화적 수단만으로는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브레이빅은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논쟁가가 아니었다. 7년 동안 몸담았던 극우정당 진보당의 모임에 참석했으나, 당의 정책이 자신의 견해와 어긋나자 그 길로 당을 떠났다. 진보당의 관계자는 "브레이빅은 정장 차림에 예의 바르게 행동한 청년"이라며 "아주 조용했고 심지어 부끄러움을 타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브레이빅은 부모가 한 살 때 이혼했지만 "중산층 가정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옌스 브레이빅은 "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기는커녕 사교성도 없었다"며 "무슨 이유에선지 아들이 15세가 되자 먼저 연락을 끊었다"고 말했다. 다만 브레이빅이 선언문에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기술한 부분을 보면 극우적 성향과 함께 여성 혐오증을 갖게 된 단초가 엿보인다. 그는 "온건 페미니스트였던 어머니는 나를 여성스럽게 양육시키려 했다"며 "하지만 여성처럼 점잔을 빼는 노르웨이인의 사고 방식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브레이빅은 학살극을 앞두고 긴장을 풀 목적으로 매춘부를 사려 했던 사실을 공개하는 등 정체성과 배치된 복잡한 심경도 드러냈다. 잭 레빈 미국 노스이스턴대 교수는 "브레이빅은 1,500쪽 분량의 선언문에 자신에게 부정적인 내용들을 시시콜콜 늘어 놓았다"며 "자신을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라고 분석했다.

한편 그가 총기 난사 때 사용했던 총탄은 '덤덤탄'으로 불리는 특수 총알로 인체 내부에서 탄두가 여러 개로 분리돼 살상 효과가 큰 것으로 밝혀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그가 AK-47 자동소총과 글록 9㎜ 권총을 반입하려다 실패했으며 미국에서 루거 권총 소음기와 탄창 30개를 구입하고 오슬로 피스톨 클럽에서 15회 훈련을 받은 끝에 1월 중순 글록 16 권총의 구매허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외래어표기법에 의거, 우토야섬을 우토에위아섬으로 표기합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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