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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사라진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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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사라진 계단

입력
2011.07.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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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나는 뱀을 빌려 고백하겠다. 나는 뱀의 성질이 아니라 뱀의 모양을 빌릴 수 있다 뱀이 당신을 감아 오르고 있다. 느낌이 좋다. 뱀에 대해 말한다면 당신은 계단이다. 모양은 뱀이 계단이지만 뱀을 밟고 올라갈 생각을 할 사람은 없다. 도중에 스르르 사라지는 계단이므로 나는 잠시, 뱀을 빌렸다. 그리고 오후 세 시 이후부터 걸어 다녔다.

늘 사용하는 감각들 중 하나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꺼버린다면 어떨까요? 어떤 예술가는 깜깜한 어둠 속에 관객을 초대해놓고 설치된 사물들을 오직 더듬어서 느끼도록 합니다. 시각적으로 익숙한 사물들을 촉각으로 만나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거예요.

그렇다면 의미를 지우고 감각만으로 사물을 느껴볼까? 시인은 어느 날 오후 3시 1분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뱀이 기둥을 오르는 모양은 빌딩의 계단처럼 보여요. 그렇지만 눈을 감고서 뱀의 계단을 오른다면 나의 발은 상당히 물컹하게 느끼겠지요. 어쩌면 무슨 일이 있었던 오후, 시인이 걷던 길이나 계단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다 갑자기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죠. 술을 마시지 않아도,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런 느낌으로 걷게 되는 어지러운 날들이 있어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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