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절 어느 날 신상옥 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서 상의할 게 있다고 해서 나갔더니 여배우 오수미를 데리고 나와 있었다. 오수미를 나한테 인사시키며 "오수미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오수미를 내가 어떻게 맡냐? 더군다나 남자도 아니고 여잔데, 여자를 내가 어떻게 맡나. 나 그렇게 못한다"고 했더니 "출연도 시키고 좀 데리고 있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출연시키는 것이야 그리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내가 데리고 있냐"며 완강히 거절했다.
그 며칠 전에 최은희가 나한테 다녀간 적이 있었다. 최은희가 "오수미 때문에 속상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신상옥과의 사이에 오수미가 있어서 지금 굉장히 문제가 심각하게 벌어지는 데…·" 하며 울고불고 신세타령을 한바탕 했다. 그런 뒤에 신 감독이 오수미를 데리고 왔으니 내가 이미 신 감독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탁을 거절하고 신 감독과 오수미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신 감독이 이번에는 윤정희를 데리고 홍콩에 다시 왔다. "'심청전' 촬영을 하는데, 한국에는 인당수 장면을 찍으려니 옛날 배가 없어서 홍콩에서 그런 배를 빌렸으면 좋겠고, 촬영하는데 보조 인원이 필요하다. 차량도 필요하고 배를 따라가며 찍는 모터보트도 필요하니 좀 준비해 달라." 신 감독의 요청이었다. 신 감독에 대해서는 못마땅했지만 한국영화를 촬영한다는데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조감독들과 촬영조수들을 동원해주었고 차와 모터보트도 준비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촬영을 끝냈다.
그러나 신 감독은 "수고들 했으니까 저녁이나 먹자" 정도의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내 인원을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주고 수고했다고 인사해야 했다. 신 감독은 수고했다든가 고맙다든가, 비용이 어떻게 지불되었는지에 대해 일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도 내게 금전적 손실만 주었고 난 노력봉사만 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어찌하랴. 돈 받으러 한국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려든 내가 어리석다' 하며 잊어버릴 수밖에.
다시 한 1년이 지났다. 1978년 1월 14일 새벽 최은희한테서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아침 7시 조금 전이었다. "웬일이요?" 하니 "어제 밤에 왔는데 급히 좀 만나야 되겠다"고 말했다. "왜 그러냐?" 하니 급한 일이 생겼다고 "빨리 좀 오세요" 했지만 촬영스케줄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촬영을 펑크 내고 갈 수는 없으니까 저녁에 만나자" 했더니 "잠깐 왔다 가라"며 막무가내였다. 그때 이미 조감독이 날 데리러 집에 와 있었기 때문에 "촬영 갔다 와서 만나겠다. 6시 조금 넘어서" 하며 저녁으로 약속을 미루었다.
때마침 홍콩에 나와 있던 영화진흥공사 지사장 유기인, 배우 남석훈, 조감독 홍성배, 신위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금성반점에 예약을 해 놓고 저녁에 갔더니 최은희는 8시가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우리보다 아마 좀 높은 사람이 초대를 했나 보다. 그러니 여기 약속을 안 지키지" 하며 웃고 넘어갔다.
그리고 며칠 뒤 일간지 정치부 기자에게서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새벽 한 두 시쯤이었다. "최은희가 이북으로 넘어갔는데 아십니까?" 난 전혀 몰랐다. "무슨 얘기냐? 며칠 전에 통화 했는데." "최은희가 지금 이북에 가서 거기서 대남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랐다. 다음 날 아침 한국에서 기자라는 기자는 모두 나를 찾아왔다. 최은희에 대해 얘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영사관에서 온 중앙정보부 직원도 날 찾아왔다. 전부 얘기해 달라는 것이지만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중에 홍콩 경시청에서 발표를 했는데 최은희는 내게 새벽에 전화를 걸었던 그날 아침에 북한으로 갔고 그 전에 북한 공작선이 홍콩에 와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홍콩 경시청에서 내게 참고인 진술을 요청했다. "왜 아침 7시에 전화가 왔냐?"는 것이 관건이었다. 결론은 "너까지 데리고 가려고 공작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그날 촬영이 없어 최은희 연락을 받고 만나러 갔다면 지금 북한에 가 있을 지도 모른다. 끔찍한 얘기다. 생각날 때마다 등골이 오싹 하다.
지금도 미심쩍은 부분은 나중에 북한에서 도망 나왔던 최은희가 나한테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내게 해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내게 "그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지 않으셔서 참 다행입니다" 이런 얘기 정도라도 해 줬어야 할 듯한데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한테도 북한에서 공작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세窩岵막?선풍을 일으켰으니 나도 공작 대상자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어느 날 밤, 낯선 이에게서 투자 제의 전화가 왔다. "미화로 500만달러를 투자할 테니까 영화사를 설립해서 영화를 만들어 주십시오" 하면서 "마카오로 좀 오셔서 서로 구체적인 상의를 하자"는 것이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이북 사투리가 섞여 나오는 말투 때문이었다.
영화감독이니만큼 말투나 억양에 민감한 편이었기에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이미 의혹이 든 이상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이북 사람이지? 나한테 지금 공작하는 거 아니요?" 그랬더니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분명히 북한 공작원이었던 것이, 당시 마카오에 '금강공사'라는 북한 공작조가 와 있었다. 500만달러를 미끼로 마카오에 오게 해서 북한으로 끌고 가 영화를 만들게 하려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북 공작조가 아니냐? 난 바쁘니까 당신네들하고 얘기할 시간이 없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지원서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련의 사건이 이어졌다. 당시 지원서국은 홍콩에서 일본 서적을 파는 유일한 서점이었다. 가끔 들러 일본서적을 사곤 했었을 뿐 지원서국 사장과는 그럭저럭 평소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친절하게 하면서 "마카오에 한번 놀러 가자"고 하며 "친구가 마카오에 있는데 당신을 좀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거기 가면 도박 자금도 그 사람이 대주고 하루, 이틀 재미있게 보낼 수 있으니 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난 도박을 할 줄도 모르고 촬영 때문에 바빠서 마카오까지 가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는데 "한국 관광을 가는데 좀 동행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관광 안내 할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다. 한국 가면 관광 가이드가 있으니 그 사람들한테 부탁하라"며 거절했다. 이 사람도 북한 공작원에 연루되어 있어 내게 공작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최은희가 오전 7시에 전화 한 것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러니 다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에 관한 자초지종과 정확한 정황은 모두 홍콩 경시청 '진술서'를 통해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최은희가 북송선을 타게 된 그 아침, 왜 내게 전화했는지 그 진실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난 신 감독이 북한으로 가기 전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게 되었으니 홍콩이라는 특별한 장소 때문에 빚어진 일종의 야사(野史)라고 생각된다. 신 감독이 다시 불쑥 찾아 온 것은 최은희가 납북되었던 그 해 7월 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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