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4시 50분(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근교 호수에 자리잡은 작은 섬 우토야. 노르웨이 노동당이 주최하는 여름 캠프가 열리고 있었고 대부분 청소년인 600여명의 캠프 참가자들은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 아름다운 섬에서 한가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관 제복을 갖춰 입은 30대 백인 남성이 섬의 보안을 점검하러 왔다며 주변의 청소년들을 불러모은 뒤, 갑자기 자동소총을 꺼내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 와, 너희들한테 전해줄 얘기가 있어, 이리 와, 무서워할 것 없어"라고 말한 직후였다.
그때부터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의 일방적 학살은 105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평화롭던 섬은 갑자기 생지옥으로 변했다. 총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호수로 뛰어들거나 숲 속의 덤불 혹은 바위 뒤로 숨었지만, 브레이빅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이 보일 때마다 조준 사격을 가했다. 생존자들은 브레이빅의 태도는 초지일관 차분했고, 절대 뛰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바위 밑에 숨었다가 목숨을 건진 15세 소녀 엘리세는 AFP통신에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며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동안 그는 총을 쏘고 또 쏘아댔다"고 상황을 전했다.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던 애드리안 프라콘(21)은 갑자기 날아온 총알에 왼쪽 어깨를 맞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프라콘은 수백미터를 헤엄쳐 호수를 건너려다 무거운 옷 때문에 다시 섬으로 돌아왔는데 브레이빅은 그때까지 호숫가에 서서 사람들을 노리고 있었다. 프라콘은 독일 dp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나를 향해 총신을 겨누었고 제발 방아쇠를 당기지 말라고 애원했더니 총을 쏘지 않았다"며 몸서리를 쳤다.
노르웨이 경찰의 대응이 늦었던 것도 사태를 키운 원인이 됐다. 경찰은 우토야섬에서 첫 총성이 울린 지 48분만에 35㎞나 떨어진 오슬로에서 출동했는데 그마저도 헬리콥터를 이용하지 않은 채 차를 타고 이동했다. 경찰특공대가 우토야섬이 보이는 호숫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 그러나 경찰특공대는 섬으로 건너갈 배를 찾지 못해 십여 분 이상 우왕좌왕하다가 오후 6시 20분에야 우토야섬 선착장에 도착했다. 브레이빅을 체포한 시간은 이보다 15분이 더 지나서였다.
그 동안 브레이빅은 섬 이곳 저곳에서 총기를 난사하며 85명을 사살했다. 이미 총격으로 쓰러진 사람은 발로 차 생존 여부를 확인한 뒤 확인 사살을 하기도 했다. 생존자 캠지 군나라트남(23)은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그가 경찰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과연 그 상황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냐"며 "경찰을 불렀지만 출동하는데 너무나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오후 3시 26분 결코 테러가 발생하지 않을 것 같던 평화의 도시 오슬로 중심부를 순식간에 폐허로 만든 정부청사 폭탄테러 역시 브레이빅의 소행이었다. 폭발 현장을 목격한 시브 하르트비그센은 "건물 전체가 크게 흔들리며 유리창이 폭발했고 이어 사람들이 이곳 저곳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고 영국 BBC방송에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또다른 목격자 에릭 위크스트롬은 "현실이 아닌 것 같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서 "미국이나 영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들었지만 결코 노르웨이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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