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이 한 시대를 조망하는 거울이고자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비루하거나 권태롭거나 속물적인 인간들뿐이라면. 역사나 환상 속에서 이야기를 찾는 게 현명할 지도 모르지만, 또 하나의 전략은 아예 뻘밭에 들어가 속물들과 질탕하게 뒹구는 것이다. 뻔뻔하고 당당하게.
작가 권지예(51)씨는 이 노선으로 무섭게 내달리는 것 같다. 최근 1~3권(1부)이 나온 <유혹> (민음사 발행)은 요리법으로 치면 간도 진하고, 향도 강하고, 불길도 세다. 빈번하고 화끈한 성 묘사가 주 메뉴인데다 여성 작가 특유의 감각적 비유까지 곁들여졌다. 그는 "초강수를 둔 거나 마찬가지다"며 "욕 먹을 각오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혹>
단편 소설로 2002년 이상문학상, 2005년 동인문학상을 받은 그의 전력을 고려하면, 2년째 신문에 연재중인 <유혹> 의 수위는 놀랍다. 신문 연재소설의 대중성을 감안하더라도, 여주인공의 남성 편력기는 위태로운 경계를 넘나든다. 이를테면 최고 요리사 자격증을 받은, 특히 프랑스 요리가 전문인(그는 프랑스 유학파로 출세작도 '뱀장어 스튜'다) 이가 강한 맛의 술자리 안주에 도전한 셈이다. 그는 "한번은 대중소설을 쓰고 싶었고, 대중소설을 쓴다면 대중소설답게 눈치 볼 것 없이 화끈하게 쓰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혹>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프랑스에서 예술경영 석사를 받은 서른여섯의 이혼녀 유미는 사랑학 전문강사이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이며 수많은 팬을 거느린 파워 블로거. 빼어난 미모와 섹스를 무기로 재벌 총수 후계자를 비롯한 숱한 남성들과 연애행각을 벌이며 성공과 복수의 드라마를 펼친다. 친구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 친구엔 연하남을 소개시켜주고, 방송 일을 매개로 PD와 관계를 하는 등 모럴이 붕괴된 인간들의 짐승 같은 욕망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내년 2월에 2부 4~5권으로 완간될 예정인데, 강도 높은 성 묘사를 제외하면 통속적 드라마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스토리 라인이다.
순문학 작가의 이 같은 변신은 일종의 배신일까. 권씨의 변론 하나. "2부에서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유미의 과거를 중심으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인간의 욕망 문제를 포괄적으로 그린다. 작품을 다 읽고 평가해달라." 화끈한 대중소설이지만, 통속소설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인간의 욕망, 특히 여성의 정체성을 다뤄온 내 주제의식은 변함없다. 성 묘사는 그것을 보여주는 핵심 장치이기 때문에 회피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더욱 솔직해 보이는 세 번째 얘기는 이렇다. "10년 넘게 소설을 썼는데, 순수소설과 대중소설의 경계가 무엇일까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순수소설이 얼마나 순수해질 수 있을까, 나 혼자 순수해져 봤자 뭐하냐 싶은."
단편에서 문학적 성취는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늘 장편이다. 사회 전체를 조망하기도 어렵고, 세계와 대결하는 문제적 개인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뛰어난 장편소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그래서 역사 추리 등 장르적 요소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 추세다. '꽃게무덤' 등 단편으로 문학성을 인정 받은 권씨도 장편 <붉은 비단보> <4월의 물고기> 등에서 장르적 요소를 도입해 강한 스토리로 나아갔다. 그는 "대중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그 방향에서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 뒤엔 어디로 튈지 모르겠지만, 뭐든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붉은>
<유혹> 에서 본격문학적 가치를 찾자면 이 기준에서 나올 것 같다. 지적ㆍ문화적 젠체함, 성에 대한 이중성 등을 속물이라고 한다면 그 전체함마저 벗겨내는 노골적 속물화, 즉 '진정성 없음'의 진정성에서다. 속물적 사회에서 대중소설로 성공하려면 적당한 문학성의 외피를 둘러야 해 노골적 성 묘사는 오히려 감점요인이다. <유혹> 은 30대 여성의 사랑과 성공을 감각적으로 그린 칙릿 소설의 감수성도 넘는다. 권씨도 "20,30대 여성들이 징그럽다고 여기며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우리 사회가 또 다른 속물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더 이상 젠체함도 필요 없는 뻔뻔하고 당당한 속물들의 사회로. 유혹> 유혹>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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