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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99세로 별세한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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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99세로 별세한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입력
2011.07.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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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드라마의 마지막 장(章)을 덮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은 16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치러진 한 유럽 왕족의 장례식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 혼돈의 20세기를 살다 간 유럽 최대 황실,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태자이다. 4일 독일 자택에서 9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그의 장례식에는 칼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부부를 비롯, 수천명의 시민이 참석해 애도했다.

합스부르크의 삶은 유럽 현대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세계 정세의 격변 속에 중세시대부터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명문가는 자취를 감췄고, 그 역시 생의 절반 가까이를 떠돌이로 살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는 몰락한 황족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 오늘날 유럽 통합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유럽인’으로 칭송받는다.

왕가의 몰락… 끝없는 도피와 유랑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은 그의 본명을 보면 잘 드러난다. 93자나 되는 긴 이름에는 유럽 명문가들의 혈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합스부르크는 1912년 빈의 작은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1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 손자였고, 어머니 치타는 부르봉 왕가의 분파인 파르마 공국 공주였다.

합스부르크가 태어날 때만해도 11개 제후국으로 이뤄진 제국은 평화로웠다. “새로운 왕자가 세기말 유럽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오는 등 나라 전체가 왕실의 경사에 들떠 있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2년 뒤인 1914년 현재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이 발생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8년 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요제프 1세마저 사망(1916년)하면서 카를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전쟁의 패배와 뒤이은 무장 혁명(1918년)은 왕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카를 1세는 이듬해 “국정 참여 중단” 선언과 함께 스위스로 피신했지만, 왕정 복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3년 뒤 망명지에서 숨졌다. 이후 열 살 소년이었던 합스부르크는 1954년 독일 남부 푀킹에 정착할 때까지 32년 동안 스페인-벨기에-포르투갈-미국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유랑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유럽통합의 이상 실현에 매진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 국민은 더 이상 왕실을 원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가 1945년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왔을 때 정부는 그를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국외로 내쫓았다. 특히 미국에서의 체류가 결정적 패착이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1940~44년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합스부르크는 종전 이후 국가를 어떻게 꾸려야 할지를 고민하기보다 오스트리아 난민그룹 사이에서 파벌 주도권을 쥐기 위한 눈앞의 이익에 골몰했다”고 분석했다.

세상의 싸늘한 시선을 직감한 합스부르크는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1961년 왕위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랜 도피 경험을 십분 살려 저술가와 강연자로 변신,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했다. 윤택한 삶이 보장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합스부르크는 반(反)나치즘ㆍ공산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히틀러의 나치는 전쟁 중 두차례나 그를 찾았다. 쫓겨난 황태자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오스트리아 병합(1938년)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속셈이었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합스부르크가 히틀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자 나치는 즉시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그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전체주의의 광기를 목도한 그에게 ‘하나의 유럽’은 평생의 화두였다. 1979년부터 20년 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기독교사회당(CSU) 소속의 유럽의회(EP) 의원으로 일하며 범유럽(pan-Europaen) 운동을 전개했고, 동유럽 국가들의 유럽연합(EU) 가입도 독려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합스부르크를 일컬어 “유럽공동체의 원동력이 된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왕정복고 바람 부나

합스부르크의 죽음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에서는 왕정복고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분위기다. 오스트리안인디펜던트는 “왕정복고단체 슈바르츠-겔베 알리안츠(SGA)가 2013년 총선에서 의석 획득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 SGA는 왕정체제를 갈망하는 여론이 무르익었다고 판단,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5개국을 연방제로 묶는 ‘민주 군주제’를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90년 전 숨진 카를 1세의 유해는 아직도 포르투갈 마데이라섬 망명지에 안치돼 있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왕정 복고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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