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젊은이들이 한 공간에서 엉덩이 서로 딱 붙이고 앉아, 함께 같은 악보 보고, 함께 같은 지휘자의 지휘봉 좇으며 하모니를 창조해 내는 장면. 생각만 해도 부들부들 떨립니다. 작은 통일입니다."
광복절인 8월 15일 전후에 남북한 청년들로 구성된 연합 오케스트라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연주회를 열도록 하겠다는 원형준(35) ㈜린덴바움뮤직 대표. 북극의 칼바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한 현재의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웬 황당맨"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의 소망은 더없이 단단하다.
"남북 통일이요? 지금 돼도 큰 일이에요. 한쪽은 지구인, 한쪽은 외계인 아니에요. 이런 '이해 불능, 소통 불능 공화국'에서 함께 살면 그건 전쟁이죠. 그래서 조금씩 서로를 애무해 가는 작은 걸음이 필요해요. 바로 이 행사예요."
그는 특히 이 행사가 오케스트라 연주회라는 점에 포인트를 둔다. "오케스트라에서는 멤버들이 모두 다른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런데 그게 신기하게 하나의 음악이 되죠. 남북도 다름을 인정하며 하나를 만들자는 얘기죠."
오케스트라 명칭은 잠정적으로 '남북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로 정했다. 남북 각각 50여명씩 100여명으로 구성된다. 남한에서는 원 대표가 2009년 이후 매년 여름 서울에서 개최해 온 '린덴바움 뮤직 페스티벌'에서 선발한 젊은 연주자들, 북한에서는 평양음대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북한은 행사에 이미 'OK' 사인을 냈다. 스위스 출신 지휘자 샤를 뒤투아(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가 지난달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문화성이 연합 오케스트라 구성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원 대표는 조만간 통일부에 사업승인 신청을 낼 예정이다.
평화의 사절 역할을 톡톡히 하고 귀환한 뒤투아는 '오케스트라 조련사'로 불리는 세계적 마에스트로. 그는 린덴바움 뮤직 페스티벌에서 음악감독을 맡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오는 동안 원 대표와는 아삼육이 됐다.
원 대표도 소싯적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음악가다. 미국 줄리어드음대와 메디슨대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한국의 한 오케스트라단 소속으로 일본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에 갔던 것이 그의 운명 좌표를 확 뒤집어 버렸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기획하는 행사였는데 음악이 완전 환상이었어요. 한국에는 제대로 된 뮤직 페스티벌이 없었으니 충격이 더 컸죠. 저도 이런 행사 한번 해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바이올린은 거의 작파하고 기획사인 린덴바움뮤직을 만들어 뮤직 페스티벌에 매달렸다. 그 성과가 바로 린덴바움 뮤직 페스티벌. 이 축제는 뒤투아와 명문 오케스트라의 파트별 수석 13명이 오디션을 통해 100여명의 젊은 음악가(18~30세)들을 선발해 연습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젊은이들은 연습 후 뒤투아의 지휘 아래 수석들과 함께 연주회를 갖는다. 특히 참가자들은 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모두 장학생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다만 올해는 이 축제가 열리지 않는다. 원 대표가 남북 행사에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 대표가 튀투아를 처음 이 축제에 끌어들일 때의 에피소드. "2009년 첫 축제가 4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수석 13명만 확정되고 지휘자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바이올린 수석으로 참여하는 캐나다인 샹탈 쥐이예(미국 새러토가 실내악 축제 음악감독)가 튀투아와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들리더라고요. '애인인데 빽 좀 써 달라'고 했더니 진짜 빽을 세게 써 준 거예요."
원 대표는 이 축제를 세계인들의 입이 딱 벌어지는 프로젝트로 키우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게 남북 행사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 대표 브랜드는 판문점이고, 분단이죠. 그런 점에 착안한 거죠."
하지만 처음부터 악전고투였다. 2009년 하반기부터 북한에 외교관이 주재하는 스위스와 벨기에 등의 갖은 인맥을 총동원해 북한과 겨우 선이 닿는가 했더니,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그해 여름 린덴바움 뮤직 페스티벌 직후 방송을 통해 남북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통일부에 의사를 타진하려 하니까 다시 11월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다. 그리곤 남북 관계는 계속 꽁꽁.
다행히 그의 부탁을 받은 튀투아가 평양 '거사'에 성공, 통일부에 조만간 사업승인을 요청할 예정이지만 얼어붙은 남북 관계 때문에 원 대표는 "가슴에 묵직한 추를 단 기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다. "이런 생 기초 교류도 안 되면 남북은 가망이 없는 거죠. 더구나 북한이 받아들였는데." 그의 말에 어쩐지 마음이 잔뜩 기울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은호 선임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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