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50가지 가방/디자인 뮤지엄 지음·정지인 옮김/홍디자인 발행·112쪽·1만5,000원
'가방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남자들은 십중팔구 물건을 담아 다니는 휴대용 수납용구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여자들에게 그것은 삶과 욕망과 자아에 대해 사색과 성찰을 요구하는 복잡다단한 질문이다. 자기표현의 패션 아이콘이자 욕망의 용광로인 동시에 사회ㆍ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자기과시의 수단이기도 한 것. 그것이 바로 핸드백의 정의이자, 1990년대 이후 폭발한 '잇 백(It Bag)' 현상의 근원이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이 엄선한 혁명적 디자인의 가방 50개를 모은 이 책은 각각의 가방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의복사적 의의, 디자인적 매력을 한데 모은 '가방 명작 선집'이다. 명작이라고 해서 소위 '명품빽'들로만 도배돼 있는 것은 아니다. 기발하고 획기적인 편의용품이었던 비닐 쇼핑백부터 미국 카우보이들이 생필품을 담아 다니던 안장 가방과 왕진의사들의 닥터백, 비닐백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에코백까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꾼 가방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리스트에는 어깨끈 하나로 여성들의 양손을 해방시켜준 샤넬 2.55백, 에르메스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를 위해 만든 단순미와 호사스러움의 상징 켈리백, 엉덩이에 매는 가방도 이토록 섹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 루이 비통의 범백 등 여성들이 침을 꼴깍 삼킬 만한 가방의 고전들이 상당수다.
하지만 고전은 언제나 전복의 욕구를 자극하는 법. 파코 라반은 샤넬 2.55백의 호사스런 허상을 폭로하기 위해 수세식 변기의 물 내리는 체인을 사용해 철제 숄더백을 엔지니어링 했고(디자인이 아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페미니스트이자 정치학 박사 미우치아 프라다는 "호사로움이란 과시적 허세가 아니라 수도자적 단순함과 실용적 엄격함에 있다"는 모토 아래 실크 아닌 나일론으로 다양한 토트백과 백팩을 만들었다. 직장여성들의 출퇴근용 가방으로 1960년대 출시된 코치의 가볍고 단순한 쇼퍼백은 베티 프리단 세대의 해방된 여성들을 위한 혁명적 백이었다.
때때로 가방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항상 페라가모 핸드백을 팔에 걸고 회의장에 나타났던 '철의 여인' 영국 대처 총리는 '무자비하게 또는 몰인정하게 대하다'라는 의미의 '핸드백하다(to handbag)'라는 동사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매년 영국 예산 발표일에 재무장관이 다우닝가 관저 앞에 들고 나타나는 붉은 공문서 송달함인 '글래드스턴의 예산안 상자', 미국 대통령이 언제나 들고 다녀야 하는 핵무기 발사 암호가 담긴 검정색 가방 '뉴클리어 풋볼'보다 권력을 더 잘 상징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한국 디자이너로는 유일하게 이상봉이 아코디언 핸드백을 50개의 가방 리스트에 올렸다.
'세계를 바꾼 50가지…'란 타이틀로 출간되는 디자인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의자, 자동차, 신발, 드레스에 이어 나온 다섯 번째 책으로, 영국의 로열 웨딩 이후 관심이 높아진 패션 아이템인 '…모자'와 함께 출간됐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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