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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블랙박스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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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블랙박스의 딜레마

입력
2011.07.2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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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야근이 잦아 퇴근할 때마다 택시를 자주 이용했던 직장인 이소영(25)씨는 최근 심야버스로 이동수단을 바꿨다. 택시에 설치된 영상기록장치(일명 블랙박스)에 노출될까 두려워서다. 이씨는 "한번은 새벽에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자랑하듯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 2대를 콕 집어 보여주며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은근 협박을 하더라"며 "내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고스란히 찍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불가피하게 택시를 탈 경우에도 휴대폰 통화조차 자제하고 카메라에 잡히지 않게끔 문 쪽으로 몸을 바싹 붙여 앉는다고 했다.

교통사고 발생시 책임소재 판단과 범죄예방을 목적으로 택시 블랙박스가 설치되고 있지만 관련 근거규정이 없어 사생활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준공영제로 운영되는 버스는 내부 영상기록장치 관리감독을 각 지자체가 맡고 있지만 민간이 운영하는 택시는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소형 카메라가 내장된 블랙박스는 보통 차량 앞 룸미러 안쪽에 부착되는데 주행 중 도로 상황을 찍을 수 있는 외부 블랙박스뿐 아니라 택시 안을 촬영하는 내부 블랙박스까지 설치하는 택시가 늘어나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 28만대 택시 중 외부 블랙박스를 설치한 차량은 17만대, 내부 블랙박스까지 설치한 차량은 1만여대로 추정된다. 2008년 인천시가 처음 도입한 택시 블랙박스는 서울과 부산 충남 전북 강원 등 각 지자체가 앞다퉈 설치 예산을 지원하며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택시기사들은 내부 블랙박스의 순기능을 강조한다. 난동 피우는 손님들을 제지하고 요금시비가 벌어졌을 때 확실한 증거물을 제출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40년 경력의 택시기사 신라성(63)씨는 "취객으로부터 폭언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껴 경찰서를 찾아가도 증거가 부족하다며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다"라며 "억울하게 맞고도 하소연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나이 많은 기사들에게 블랙박스는 유일한 방어수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찍힘을 당하는 승객들은 기분이 찜찜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승객들 중에는 블랙박스의 존재 자체도 모르거나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이 유출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인터넷에서 '택시 진상 손님'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택시 기사와 시비를 벌이거나 난데없이 욕을 하며 행패를 부리는 승객들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인 한보라(31)씨는 "요즘 세상엔 워낙 CCTV가 많아 찍힘을 당하는 게 익숙하지만 인터넷에 영상이 공개될 만큼 관리가 허술하다는 것에 경악했다"며 "내 모습도 어딘가에 떠돌아 다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불안해했다.

유출된 영상이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최근엔 한 택시기사가 택시에서 여성과 과한 스킨십을 나눈 현역 국회의원에게 영상 공개를 빌미로 뒷돈을 요구해 거액을 갈취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문제는 블랙박스 영상기록물 유출을 처벌할 수단이 현재로선 없다는 점이다. 행안부는 택시 블랙박스의 사생활침해 논란이 제기되자 지난해 12월 택시 폐쇄회로(CC)TV 관련 개인정보 보호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구속력이 없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가이드라인에는 블랙박스 설치 안내문 부착과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지정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일선 택시회사 관계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김명현 과장은 "회사별로 영상 칩을 개인적으로 유출하지 말라고 기사들에게 권고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행안부 관계자는 "9월 30일 시행되는 개인정보보호법에 택시 내부 음성녹음 금지, 동영상 촬영 고지 등의 의무와 처벌 규정이 마련돼 있는데, 그 때까지는 택시 블랙박스의 부작용을 규제할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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