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개월짜리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이모(36)씨는 최근 아이와 함께 TV 인기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을 보다가 채널을 돌려버렸다. 입만 열면 '매우 쓸모 있는 기차(really useful engine)'가 돼야 한다고 되뇌는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그의 친구들이 '사장님'으로 번역된 뚱뚱한 역장(fat controller)의 마음에 들지 못할까 봐 불안, 초조해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토마스, 퍼시, 제임스 등 꼬마기관차들은 사장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어떤 난관이 있어도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고, 제대로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 땐 혹시 폐차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심지어 사장 딸의 생일을 맞아 그 가족들을 파티 장소까지 태워다 줄 기차로 선정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씨는 "워낙 유명한 애니메이션이라 유익한 내용이겠거니 하고 틀어줬는데, 아이들이 감정이입하며 보는 꼬마기관차들이 자본가의 이익과 안녕에 복무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노예화된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며 "다시는 아이에게 이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5세 딸을 키우고 있는 '워킹대디' 강모(37)씨는 아예 1년 전부터 이 애니메이션을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어차피 사회생활을 하면 겪어야 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불평등한 주종관계를 어릴 때부터 알게 해주긴 싫다는 것이 이유. 강씨는 "유난 떤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권력자와 피지배층,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종속관계를 당연시하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며 "설사 내 아이가 자라 고용인이 되더라도 이런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만화영화를 보여주려는 젊은 부모들이 늘고 있다. 스펀지처럼 주어지는 대로 외부 자극을 흡수하는 유ㆍ소아기 아이들의 특성상 무방비 상태로 날마다 시청하는 TV 애니메이션이 그 어떤 책이나 교재보다도 의식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육아 블로그와 카페가 활성화하면서 인기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서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비평들이 자주 올라와 젊은 엄마 아빠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토마스와 친구들'에 관해선 "천진난만하게 놀아야 할 아이들에게 열심히 노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심어줘 섬뜩하다" "사장의 지시를 제대로 해냈을 때만 인정받게 된다는 세상의 원리를 가르치고 싶지 않다. 내 아들 딸을 세상이라는 공장의 인부로 키우고 싶지 않다" 등의 의견이 많다.
실제 '토마스와 친구들'은 2009년 캐나다 알베르타 대학의 샤우나 윌튼 교수(정치학)가 만화 속 숨겨진 아젠다를 지적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한 차례 논란이 된 바 있다. 토마스로 대변되는 짓밟힌 노동자들과 뚱뚱한 역장이 대표하는 자본가 계급이 사회 위계질서의 최상위와 최하위를 구성하면서 노동계급 억압, 권위에의 무조건적 복종, 극한 생존경쟁, 성 차별 등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
'토마스'와 함께 유아 애니메이션의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뽀로로와 친구들'도 양성평등의 관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깐깐한 부모들의 레이저에 포착된 이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루피, 패티 등 여자 주인공들에 대한 성 편향적 묘사. 10여명의 등장인물 중 여성은 단 두 명으로 수적으로도 소수자인 데다 성 역할도 매우 고정적으로 설정돼 있어 은연 중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루피는 통통하고 후덕한 외모에 요리를 좋아하는 수더분한 성격으로, 많은 장면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친구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엄마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반면 패티는 요리에는 소질이 없지만 출중한 외모에 새침하고 발랄한 성격으로 남자 캐릭터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둘은 단짝친구로 우정을 나누지만 가끔 서로 경쟁, 견제하기도 한다.
TV 애니메이션 속 성 편향적 설정은 가족관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토마스'와 '뽀로로'를 비롯해 '유후와 친구들' '헬로 코코몽' 등 많은 인기 애니메이션이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어린아이와 그 친구들의 우정과 모험이라는 구조로 설계돼 있고, 가족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호야네집'으로 번역, 방영 중인 캐나다 애니메이션 '카이유', 백희나 작가의 동명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구름빵', 뽀로로 후속 '치로와 친구들' 등 몇 편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애니메이션들이 엄마 캐릭터를 모두 전업주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엄마들은 모두 아이들을 위해 집에서 빵을 굽고 식사를 챙겨주는 모습으로만 그려질 뿐 워킹맘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단 한 편도 없다. 여성 캐릭터가 모두 전복적일 필요는 없지만, 천편일률적인 가부장제적 묘사는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시청 연령대가 좀 더 薦?마법소녀물 같은 변신서사는 한층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학술이사인 김윤아 박사(영화이론 전공)는 "어린 소녀가 나신의 실루엣을 보이며 빙글빙글 도는 변신 과정을 거쳐 성인 여성의 섹시한 몸매와 화려한 외모를 갖게 되는 반복적 장면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섹슈얼리티가 투영돼 있다"며 "이는 자기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시기에 왜곡된 자기이미지를 갖도록 부추길 우려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애니메이션들을 아예 안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이 시청 과정에서 스스로 텍스트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수정, 여과해 볼 수 있도록 부모들의 세심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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