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건강보험 약가를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충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장의 재정절감 효과를 보기위해 쉽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가를 일괄인하하면 보험 재정이 절감돼 정부에 좋고, 약값 부담이 줄어 국민에게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 정책적 고려는 빠져 있는 듯하다.
문제는 약을 생산·공급하는 국내 제약산업이 이를 감내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값 충격을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부담이다. 우리 제약산업이 꾸준한 노력으로 국민건강에 필수적인 의약품을 자력생산하고 저렴한 약의 공급을 통해 건강보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낮게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그동안 쌓아 올린 산업의 기반이 흔들릴까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산업은 한 순간에 붕괴될 수 있지만, 일으키는 데는 몇 배의 노력으로도 불가능 할 것이다.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의 제약산업은 좋은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자국 제약산업의 몰락으로 의약품 자급률이 10~30%에 그칠 정도로 침체돼 있다. 그래서 수입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비싼 약값을 부담하고 있는 것이 이들 나라의 현실이다.
보험약가 인하 계획의 허점을 조목조목 따져보자. 첫째, 시기의 부적절함이다. 국내 제약산업은 현재 미국 FDA 허가 신약을 포함해 20개의 국산신약을 개발해 내며 세계 10대 신약개발국의 위치에 올라섰다. 신약개발 강국으로 비상하는 마지막 이륙 단계에 접어든 셈이다. 그런데 정부의 계획은 엔진을 최대 출력으로 가동해야 하는 때에 비행기의 연료를 빼내버리는 조치와 다를 바 없다. 특히 FTA 협상에서도 피해산업으로 인정돼 정부도 각종 지원책을 약속한 상황에서 내려진 초강경 정책이란 점에서 정부의 진의를 파악할 길이 없다.
둘째, 산업이 감내 못할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다.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기존 보험약가의 인하액 8,900억 원과 작년 10월부터 시행한 시장형 실거래가제도 등 이들로 인한 피해규모가 단기에만 1조~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큰 충격이 진행 중임에도 1년도 안되어서 또다시 엄청난 3조원까지 추가 약가인하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조치다. 1년간 보험약품비가 13조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셋째, 정부는 구매력지수(PPP)를 내세워 우리나라 약값이 외국보다 비싸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교역이 활발한 의약품은 구매력지수가 아닌 환율로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하며 이럴 경우 오히려 OECD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이 된다. 이는 우리나라 보건통계를 OECD에 보고하고 있는 학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넷째, 불법 리베이트를 근절하기 위해 모든 보험약값을 인하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엄한 처벌로 다스려야 할 문제를 일률적 약가인하로 해결하면 성실한 제약기업의 R&D활동은 물론 시장의 기능까지 위축시키는 부작용이 따른다.
우리 제약산업이 반값에 가까운 보험약가 인하 충격을 이겨내고 동남아 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형국이다. 대대적인 고용 감축과 R&D 축소, 생산시설 매각 등의 자구노력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21세기 성장동력은커녕 산업의 경쟁력은 한참 뒤처지게 될 것이다.
당장의 정책성과에 급급하다 산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면 동남아 국가들처럼 국민의 약값 부담은 오히려 증가할 게 뻔하다. 보험의약품 공급자로서 제약업계도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 방안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 역량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제약산업의 미래를 건 극단적 정책 추진은 중단돼야 옳다.
이경호 전 보건복지부 차관 ·한국제약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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