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화재단 출범식에 초대한다는 죽마고우의 연락을 받았다. 순간 오랫동안 친부모님처럼 따랐던 그의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화재, 미술작품 등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나로서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원로화가 권옥연 화백이고 어머니는 연극인이자 무대 미술가 이병복 여사이다. 그분들이 문화재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팔십이 훨씬 넘은 연세에 재단 설립이라니 무슨 일을 더 늘리셨는지 궁금했다.
1982년 초여름이었던가? 대학 선후배를 주축으로 현악합주단을 결성하여 금곡마을에 기거하며 합숙 훈련으로 일주일을 지낸 적이 있다. 당시엔 그 곳이 한국식으로 만든 단순한 별장이라 생각했었다. 기념식이 다 끝난 후에야 우리가 머물렀던 곳이 '궁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지만. 학창시절 문화재 식견이 부족했던지라 막연히 옛 물건들, 문짝들을 어디에선가 구해서 달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단순히 자연과 더불어 운치 있는 고택의 정서적 안정감이 젊은 시절의 순수하고 자유스러운 꿈으로 남아있는 옛 기억을 되새기며 금곡마을과 관련된 일이겠거니 하고 출범식에 참석했다. 식은 차분한 가운데 유명 예술인과 사회 지도층의 인사말과 격려사로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여느 기념식과 다를 바 없었다.
마지막으로 재단 설립자 이병복 여사의 결과 보고가 이어졌다. 반세기의 영화와 같았던 과정들이 스크린을 통해 영상으로 보여졌다. 62년부터 경기 남양주 금곡마을 일대에 땅을 사서 박물관 부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당시 아무렇게나 방치되고 철거 위기에 놓여 있던 전국의 고택들을 해체한 뒤 옮겨와 그곳에 다시 복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어진 집은 조선시대의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의 시댁이었고 궁의 대목장인들을 파견해 지은 집이라 해서 '궁집'으로 불린다. 순조의 큰며느리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집이었던 '군산집', 구한말 송병준 대사의 가옥이었던 '용인집' 등 그렇게 복원한 건물이 7채. 원래 '궁집'을 포함해 8채가 곳곳에 터를 잡고 있다.
이들 한옥들은 각기 그 구조가 달라 연극, 공연은 물론 영화촬영, 의상발표회, 학술회 등 다양한 성격의 문화 예술행사가 가능하게 지어졌다. 게다가 대한민국 문화 우수성을 해외에 널리 홍보하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찾아 복원하고 자연과 어우러져 더 없는 최고의 종합 예술작품으로 완성될 무렵 갑자기 근처의 산과 개울이 면도칼로 잘리듯 한 순간에 없어지고 자연을 담은 그림 같은 이웃집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날벼락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택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일대가 아파트 건설부지로 변경되어 모두 없애겠다는 한 장의 통보서를 받은 지 며칠만의 일이었다.
이에 노부부는 고택을 부수려는 포크레인 앞에서 버티며 설득하여 간신히 재변경 신청을 허락 받아 박물관 부지의 5분의 1만을 겨우 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과정이 시련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현재 처음 지어진 '궁집'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박물관 관리지원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노부부의 마지막 희망은 간단했다. 우리의 귀중한 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전수하자는 것이다.
유독 '무의자(無衣子) 박물관'이라는 이곳의 이름이 와 닿는다. '無衣子'는 '벌거벗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와 죽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다. '無衣子' 석자만으로도 그들이 하고 싶은 뜻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송재광 이화여대 음대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