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모처럼 만의 일본방문에서 나는 일본사회가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와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지인들을 만났다. 워낙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자연재해를 당했기 때문에 피해복구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본의 저력을 믿기에 낙관적으로 생각했었는데, 현지에서 만난 일본 지식인들의 위기의식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대지진이 발생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일본사회가 그 충격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불신이 심화되고 일본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등 전반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과 위기 징후 뚜렷한 경제대국
대지진 이후 일본사회에서 전례 없는 위기가 계속 진행 중이라는 징후들은 다양하다. 우선 원전사고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일본국민들의 불안감과 공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원전의 이용문제에 대한 이견과 대립이 표출되고 있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차제에 원전의 완전한 포기를 원하지만, 일본 재계와 정치권 주류세력들은 일본 전력생산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경우 전력부족 현상이 장기화되고 일본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원전 유지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원전 이용에 대한 이견은 일본의 에너지 시스템과 산업화의 경로를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이냐의 문제와 연관되고 이를 둘러싸고 큰 기득권이 걸려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갈등과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로, 일본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일본 국민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본 기업들 일부가 중국과 한국 등으로 생산시설의 이전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있고, 부산 지역에서 일본인들의 부동산 취득도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셋째로 대지진과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면서 정치적 리더십이 실종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집권 민주당이 간 나오토 총리사퇴를 둘러싸고 자중지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일본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간 총리가 사임하고 자민당으로의 권력이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자민당 정부가 등장하더라도 현 위기를 돌파할 리더십을 발휘할 지도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대지진 이후 일본사회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후는 일부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 동안 일본을 지탱했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인 와다 하루키는 대지진을 출발점으로 해서 새로운 일본의 장래를 구상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데, 그는 원전이외의 신에너지 시스템과 새로운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일본의 우경화 여부 주시해야
일본사회가 대지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총체적 위기에 빠지는 상황은 한일관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국내적 위기에 직면한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강경책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국민들의 지지를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위축되고 일본인 자경단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이번 경우에도 일본 정부가 영토와 교과서 문제 등에서 우익적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
한국으로서는 향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차원에서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가를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일본 외교정책이 우경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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