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16> 여장부 모윤숙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16> 여장부 모윤숙

입력
2011.07.19 12:37
0 0

해방 후 최초의 문학 전문지인 월간 <문예> 가 태어난 명동 문예빌딩은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모윤숙에게 하사했다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모윤숙의 대표작 <렌의 애가> 는 춘원 이광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내가 그이에게 직접 듣기로는, 자기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춘원만큼 그렇게 광채 나는 눈빛을 지닌 사내는 없었다고 하였다. 나중에 모윤숙은 춘원의 소개로 독일 예나대학의 철학박사였던 안호상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무렵의 결혼식 풍습도 지금과는 달라서 신부 입장 때는 김활란 박사가 나란히 서서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모윤숙은 그 순간에도 도무지 새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고 전혀 실감이 안 나더란다. 그러자 김활란 박사는 모윤숙의 귀에다 살짝 속삭이더라는 것이다.

"어때, 지금이라도 그만두자. 그냥 집어치우고 나갈래?"

그렇지만 이미 신랑은 주례선생 앞에 나가 이쪽을 향해 서서 신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마당이다. 도저히 그럴 배짱까지는 없어 그냥 그대로 식을 치렀는데, 끝내는 딸 하나만 낳고 얼마 못 살고 둘은 헤어지고 만다.

그 이야기를 모윤숙에게 직접 듣는 순간에도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김활란이라는 여자였다. 감히 그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했던 김활란이란 여자의 호담한 인간적 크기….

그 훨씬 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 두 여장부는 장면 박사, 조병옥 박사와 함께 미국과 유엔을 상대로 한 외교 무대에서 이승만을 도와 혁혁한 역할을 해 낸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이던 인도 외교관 메논과 애틋한 사랑 소문까지 나돌기도 한다.

그 이야기도 나는 그이에게서 직접 들었다. 경주 등 여러 곳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며 우리나라의 옛문화를 소개하였는데, 그 뒤 메논의 초청으로 인도에 가서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보고는 그 어머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하면서 우리네 불국사나 고궁을 안내했던 일이 슬그머니 창피해지더라는 것이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쳐 서울 화양동의 저택에 살던 모윤숙은 한때 '라운드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문인들이 모여 저녁 먹고 술 한 잔씩 마시며 즐기는 자리였는데, 주 멤버는 월탄을 비롯해 이산, 소천, 안수길, 박진, 이항녕, 김종문, 전숙희 등이었다. 이 중에 어쩌다 나도 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도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당시 우리 문단의 남녀 통틀어 모윤숙만한 사람이 없었다. 서글서글하고 털털한 듯하면서도 어느 남성보다도 기국(器局)이 컸다.

언젠가, 1966년쯤 될 것이다. 펜클럽 주최 지방 강연으로 대구, 마산, 부산을 같이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때 대구에선가, 사무국장이던 독문학자 곽복록이 일 처리 때문에 모윤숙의 방에 들어갈 일이 생겼는데, 박경리와 함께 쓰던 그 방에 혼자 들어가기가 좀 뭣 했던지 나더러 같이 들어가자고 하였다.

그러마고 방을 노크하고 문을 열자, 모 여사는 "응, 어서들 들어와. 난 그냥 이렇게 누워 있을래. 양해들 하라구" 하고 그냥 베개에다 가슴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나는 마침 술도 얼근했던 터라 "어때요, 제가 안마 좀 해드릴까" 하자 모 여사도 "좋지. 고향 젊은이에게 안마 한 번 받아보자꾸나" 하였다.

나는 곧장 서슴없이 파자마를 입은 모 여사의 엉덩이를 타고 앉아 등을 주무르고 두드리면서 능청 섞어 한 마디 하였다. "영광이지 뭐요. 모 여사의 등허리를 이렇게 타고 앉기는, 하나, 둘, 셋, 그러니까 내가 네 번째 정도는 될까요" 하자, 모 여사는 와락 "비켜라, 이 눔 자식" 하고 등을 흔들어 나를 떼어 놓았다.

하지만 모윤숙은 그런 일로도 꼬옹 할 사람이 아니었다. 1분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서글서글한 본래의 그이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그 때도 나는 그이의 드물게 큰 인간적인 기국을 새삼 느꼈었다.

모 여사는 나를 고향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다. 본시 그이는 평안북도 정주 사람인데, 고모 한 분이 원산 명사십리 옆 두남리에 살고 있어, 호수돈 고녀를 다니며 방학 때면 늘 고모 집에 왔고, 명사십리를 자기 시로 써서 온 세상에 유명하게 만든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그 두남리에서 다시 남쪽으로 2㎞가 될까 말까 한 곳, 갈마반도의 바로 이웃이었다. 두남리 서쪽으로 2㎞ 떨어진 중청리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호수돈 고녀 시절 모윤숙은 사람이 죽어 그쪽으로 상여가 올라갈 때면 신발짝을 양손에 들고 맨발로 상여 뒤를 쫓아가며 상주보다도 더 서럽게 우는 재미에 한껏 맛을 들였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까지 쫓아 올라가서 한바탕 울고 배불리 음식을 얻어 먹고 돌아오면 고모 집에서는 애가 없어졌다고 생 난리 법석을 피우곤 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직접 들었다. 그러나 모윤숙은 시치미를 뚝 떼고, 상여 따라갔던 기척은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도 모윤숙은 어릴 때부터 매사에 남다르게 민감하면서 애어른 같은 능청스러움도 있었던 것 같다. 상여 나가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했다는 것도 시인의 자질이 아니었을까.

그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경동교회에서 상(喪} 행사를 치렀다. 그이의 상여가 나갈 때 나는 문득 그 상여를 한 번 직접 매만지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상여를 따라가며 상주보다 섧게 울던 어린 모윤숙이 떠올랐던 것일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