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자식들아, 나는 살아있다."
최인호답다. 영화 '빠삐용'에서 수용소를 탈출하는 빠삐용이 망망대해로 뛰어들면서 외친 이 말로 최인호는 심경을 드러냈다. 침샘암으로 투병하며 은거했던 그가 최근 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암에 걸려 "인생공부 많이 했다. 야코 많이 죽었지…"라고 했다. 암은 오히려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원이 한 가지 있다고 했다. 내년 4월1일 만우절에 기자회견을 열고 싶다고,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한 것은 외로워서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말할 거라고,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고. "뻥이야!"
그의 말투가 떠오르며 웃음이 나는가 했더니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래, 최인호답다, 결코 최인호는 '야코' 안 죽었다, 싶었다. 자신을 갉아먹는 암마저도 그는 '낯익은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은 내게 최고의 선물"
3년여 전부터 인터뷰를 하려 해도 그 무렵 암투병을 시작한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지난해 1월에는 무려 35년 동안이나 월간 샘터에 연재한 소설 의 집필도 중단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렸다. 35년이라…, 그러고 보니 기자가 그의 소설을 처음 읽은 때부터 치면 그가 1997~2000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소설 담당 문학기자를 했던 시절까지를 포함해 어느새 35년 세월이 흘렀다. 담당 문학기자라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는, 늘 원고지에 만년필로 작품을 쓰는 그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난필로 보내오는 원고를 해독(?)해서 정리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미 최인호 소설의 애독자였던 기자로서는 그의 새 소설의 첫 독자가 됐다는 자체로 즐거운 작업이었다. 아무튼 최인호는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손발톱이 모두 빠져버려 는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역시 만년필로 원고지에 썼다고 한다.
최인호의 공식적 등단은 1963년 고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것부터 치니까, 그의 작가 생활은 기실 50여 년이다. 그 동안 '청년문화의 기수' '영원한 감수성의 작가'라는 찬사부터 '상업주의 작가'라는 비아냥 섞인 평까지 함께 들었던 최인호지만, 기자가 알기로 그만큼 열심히 많이 창작하고 또 끊임없이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가며 소설로 써내는 작가는 드물다. 그는 1945년생, 이른바 해방둥이다. 온전히 한글로 말과 글을 배우고 쓴 첫 세대인 셈이다. 이후 한국에서 문학이라는 것이 문화적 위엄을 가졌던 시대나,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다른 모든 지식행위나 저항행위를 선도 혹은 압도했던 1980~90년대나, 문학이 한없이 하찮게 취급되고 있는 듯 보이는 지금이나, 최인호는 언제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소설을 써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여전히 문학을 찾는 독자들의 사랑에 값 하는 작가다.
베이비부머로 불리는 기자를 포함한 최인호의 뒷세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자랐다. 중고교 때는 그의 학원소설 를 읽으며 가슴이 두근거렸고, 군사정권 눈치 보던 신문이 속 시원한 기사 못쓰고 끙끙대던 1970~80년대 그때만 해도 일간지 문화면 한가운데를 차지했던 그의 연재소설을 읽으며 낄낄거렸으며, 그가 노랫말을 지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역시 최인호 원작소설이다)의 삽입곡 '고래사냥'을 고래고래 불러대며 젊음을 보냈다.
다시 청년작가처럼 일어나길
"나는 작가다. 일곱 살 때부터 나는 오직 작가만을 꿈꿔왔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내 생의 목표다"라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말 쓰고 싶은 글을 한 편이라도 쓰고 죽는 작가는 거의 없다." 이 말은 그가 '정말 쓰고 싶은 글'이 많이 남았다는 의미로 들린다. 최인호에게 부탁하고 싶다. 내년 만우절에는 진짜 "내 암은 뻥이었다"고 말해 우리를 웃겨 달라고.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1970년대 당신이 썼던 중편소설 '두레박을 올려라'의 제목처럼, 50여 년 우리와 함께 해온 당신의 글의 두레박을 다시 힘차게 길어 올려 달라고.
하종오 편집국 부국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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