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60~70년대 주먹으로 충무로를 주름 잡았다. 액션 스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스크린 밖에서도 그의 발과 주먹은 번쩍였다. 여러 폭력 사건에 연루돼 구치소 신세를 졌고, 그 안에서도 주먹다짐을 불사했다.
박노식(1930~1995). 젊은 세대에겐 배우 박준규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드라마틱하게 생긴 얼굴만큼 선 굵은 영화들에 주로 출연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올드팬들에게 의리의 사나이로 각인된 그는 역동적인 액션영화 14편을 직접 연출했는데 그 중 13편에서 주연까지 해냈다(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부제목은 박노식 연출 영화 제목이다). 할리우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연 겸 연출을 무리없이 해낸 셈이다.
지난 14일 개막한 제1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에서 감독 박노식의 작품 5편을 만날 수 있는데 참 걸물들이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영화는 '집행유예'(1973)였다. 제목부터가 남다르다. "(폭력사건으로) 하도 집행유예를 많이 받아 '집행유예'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박노식의 바람이 반영된 이 영화는 일본을 배경으로 멜로와 액션, 스릴러 등을 뒤섞어 놓았다.
촉망 받는 권투 선수였던 쇼지(박노식)가 '조센징'인 사실이 들통나 일본인 약혼녀 히데코(우연정)와 그 가족에게 버림 받게 되는 잔인한 현실이 줄기를 이룬다. 살인 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간 권선호(쇼지의 한국명)가 한센병 환자로 위장해 탈옥에 성공한 뒤 히데코를 납치해 사랑의 복수를 자행하려 하면서 이야기는 가지를 뻗어간다.
히데코가 "아무튼 난 엽전은 싫어요"라고 말하자 그녀를 묶으며 권선호가 던지는 기름기 어린 대사. "좋다. 엽전의 쇳소리가 얼마나 강한지 들려주마." 이어지는 강제적인 육체 관계…. 대책 없이 비장하고 한 없이 촌스럽고 마초성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일본에서 촬영했고, 영화 막판 할리우드 뺨치는 자동차 추격 장면으로 스펙터클을 더한다. 김진규와 도금봉, 황정순이 포진한 배우진도 화려하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메가폰을 들고 연기까지 한 톱스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신성일과 최무룡, 김진규, 최은희 등이 감독이라는 또 다른 직업으로 충무로를 누볐다. 그만큼 다양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와 관객들을 즐겁게 했고, 그 활력이 충무로 황금기를 더욱 풍요롭게 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고, 세태가 변했다지만 배우의 감독 겸업은 산업적 융성의 한 지표가 아닐까.
경찰의 심문을 받던 권선호는 종교를 묻자 단호히 외친다. "하나님은 장가 갈 때나 믿고, 부처님은 죽을 때나 믿는 것이야." 옛 황금기의 자신감을 반영한 듯한, 밑도 끝도 없이 혈기로 가득한 그 대사가 문득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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