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100억원대의 여름 대작 영화 '고지전'과 '퀵'은 20일 나란히 개봉한다. 하지만 부지런한 관객이라면 이번 주말 관람할 수 있다. 두 영화가 각각 전국 153개와 130개 스크린에서 10만명 규모의 유료 시사회를 열기 때문이다.
말이 유료 시사회지 변칙 개봉이라 할 수 있다. 하루 1,2회 정도 상영하는 거라지만 기존 상영작들의 상영 시간대를 꿰차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음주에나 대작들에 스크린을 내주리라 예정했던 기존 상영작들은 벌써 조금씩 '방'을 빼야 하는 형국이 된 셈이다. "개봉에 앞서 입 소문을 내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라는 게 '고지전'과 '퀵' 투자배급사들의 입장이다.
무너진 영화 유통 질서
국내 극장가 유통 질서가 무너지면서 작은 영화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덩치를 앞세운 영화들이 변칙적인 방식으로 스크린을 뺏거나 힘의 논리로 스크린을 점령하고 있다. 영화 산업의 건전화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변칙 개봉만 문제는 아니다. 두 영화의 당초 정식 개봉일자는 목요일 개봉 관례에 맞춘 21일이었다. '고지전'이 하루를 앞당기자 '퀵'도 질세라 개봉일을 앞으로 옮겼다.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들이 예상보다 하루 먼저 두 대작 영화의 파상 공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흔히 '퐁당퐁당' 상영으로 일컬어지는 교차상영도 유통 질서 교란의 주범이다. 교차상영은 한 스크린에서 두 개 이상 영화가 번갈아 가며 상영되는 것을 가리킨다. 상영 시간이 일정치 않고 관객이 거의 없는 시간대에 상영될 수 있어 종영 조치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09년 '집행자'의 제작자와 출연배우가 극장들의 교차상영에 맞서 삭발을 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자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안 마련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대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교차상영은 2008년 공정거래위원회가 4대 멀티플렉스 체인의 조기종영 조치에 시정조치명령을 내리면서 생겨났다. 편법적인 상영 방식인 셈이다.
유통질서가 무너지고 있지만 극장들은 시장논리만 외치고 있다.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를 상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장논리가 낳은 가장 큰 문제는 최근 '트랜스포머3' 개봉으로 다시 불거진 스크린 싹쓸이다. 여름 등 대목만 되면 특정 영화 한 편이 전국 스크린의 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극장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멀티플렉스 관계자는 "'트랜스포머3'만 해도 개봉 전 예매율이 90%를 넘어 우리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함께 개봉한 영화들이 시기를 잘못 잡은 것이다"고 밝혔다.
강자만 살아남는 상영 구조
극장들이 시장논리를 앞세워 유통질서 붕괴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죽어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영화들이다. 대형 투자배급사를 등에 업지 못하거나 덩치가 큰 영화가 아니면 힘의 논리에 밀려나기 일쑤다. 유통질서가 무너지다 보니 어느 극장의 주말 상영작 명단에서 개봉 예정작이 반 이상 차지하는 기괴한 현상까지 벌어진다. 김기덕 감독은 15일 보도자료를 통해 "('고지전'과 '퀵'이) 유료 시사로 잡은 극장들은 보통 저예산 영화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숫자"라며 "그 안에서 피해를 보는 영화들은 개봉 룰을 지키며 노심초사하는 작고 힘 없는 영화들"이라고 주장했다.
강자만 살아남는 식의 영화 유통 구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대형 투자배급사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대작들이 극장을 장악하면서 작지만 단단한 상업영화들이 제대로 평가 받을 기회조차 없이 퇴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투자배급사의 관계자는 "큰 영화들이 극장에서 출혈 경쟁을 하며 작은 영화들을 내쫓다 보면 영화계의 다양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며 "이 상황을 방치하다간 영화계가 공멸할까 두렵다"고 밝혔다.
영화진흥위원회도 '표준 상영 계약서' 도입을 통해 유통 질서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표준 상영 계약서'엔 교차상영 시 총 상영기간을 2배로 연장하거나 최소 상영일수(2주일)를 보장하는 방안, 슬라이딩 시스템 도입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슬라이딩 시스템(Sliding System)은 개봉 초기에는 제작사와 투자 배급사가 입장권 수익 배분을 많이 받다가 점점 극장의 수익 비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슬라이딩 방식이 도입된 미국에서 '트랜스포머3'의 개봉 주말 스크린 점유율은 23.5%에 불과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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