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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정말 멋지게 늙어가는 리처드 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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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정말 멋지게 늙어가는 리처드 기어

입력
2011.07.1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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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다녀왔다. 일산에 산다는 이유로 혹은 직업상 꼭 봐야하는 영화들 소화하기에도 벅차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위안해온 지 실로 오랜만의 전시회 나들이였다. 소요 시간 때문에 웬만큼 중요한 약속이 아니면 강남 가기를 꺼려하는 나 같은 귀차니스트를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게 만든 것은 불교 신자로 살아온 지 꽤 된 초로의 한 남자였다. 배우 리처드 기어가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고, 티베트 등지에서 사적으로 찍은 사진들을 자선기금 조성을 위해 전시한다는 것이었다. 그 뉴스를 접한 순간 소녀처럼 설레었다. 마치 짝사랑 했던 추억의 연인을 그의 근사한 작업장에서 들키지 않고 마음껏 볼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고백하건데, 대학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우연히도 영화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내가 처음으로 매료됐던 남자배우가 기어였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에서 가장 남자답고 잘 생겼다는 억지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그는 대중의 숭배를 받는 꽃미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목구비를 하나씩 뜯어보면 잘 생긴 구석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겐 미모보다 훨씬 강력한 매력인 그만의 아우라가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까지 50여 편의 다채로운 출연작을 갖고 있는 거물이지만 배우 초기시절 한국에 수입 된 그의 영화 대부분은 남성다움과 섹시함을 강조하는 작품들이었다. (1977), (1980), (1982), (1983)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할리우드 현지에서는 그를 배우로 각인시키고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를 꼽을 때 주로 앞의 세 작품이 언급된다. 그런데도 개인적인 기억 속에는, 이 영화들 중 공식적으론 가장 범작으로 평가받는 의 기어가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다. 물론 그 때는 이 작품의 프랑스 원전(原典)인 장 뤽 고다르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을 보기 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운명적 사랑을 위해 하등의 손익계산도 없이 배신과 죽음까지도 '유쾌하게' 감내하는 역동적인 순수 청년을 큰 스크린에서 처음으로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성성이나 무모함만으로 포장된 섹시함이 그의 전부였다면 영화산업의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이토록 평생에 걸쳐 그의 팬으로 남아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몸 파는 남자 같은 천박한 역을 맡아도 그에겐 콕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품위 같은 게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상징처럼 돼 있는 부드러운 은발과, 애당초 동안(童顔)과는 거리가 멀었던 '중후한' 얼굴 및 강인한 몸매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그 기품의 실체를 최근에야 조금 더 알게 됐다. 그가 70년대 후반 티베트를 이미 방문했을 뿐 아니라, 80년대 들어서는 전쟁과 정치적 폭력이 난무했던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지에까지 의사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인권보호운동에 일찌감치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그의 이면에 주목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엔 아예 기어재단을 설립해 이후 국경을 초월한 자선 구호활동까지 꾸준히 병행해왔다고 한다.

그가 순례자의 마음으로 렌즈에 담아낸 소박한 사진들도 반가웠지만 전시실 근처에 설치된 TV 모니터에서 재생되고 있던 현각 스님과의 대담 내용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누구라도 이젠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해요"라며 자만과 독선에 대해 경고하더니 "(참선 뿐 아니라) 세상 속에 사는 것이 수행이고...(중략)...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내겐 좋은 수행이죠"라고 미소 짓는 이 남자의 나이 62세. 정말 멋지지 않은가.

김선엽 수원대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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