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촉진제라도 맞은 걸까. 말 그대로 일취월장이다. 2008년 제작비 6억5,000만원짜리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한 지 불과 3년 만에 100억원대의 블록버스터를 내놓았다. 두 번째 연출작 '의형제'로 546만명을 모은 것이 고작 1년 반 전 일이다.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월반을 거듭해 대학으로 직행한 형국. 그 만큼 영화적 성장 속도가 빠른 감독이 충무로에 또 있을까.
여름 시장을 겨냥한 전쟁 대작 '고지전'의 장훈 감독을 1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촬영하며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자 그는 "저보다 배우들이 고생해 미안할 따름"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고지전'은 한국전쟁 정전협상이 한창이던 때 동부전선의 격전지 애록고지를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한 실체를 전한다. 지도 위 1㎝에 불과한 땅을 놓고 지루한 휴전 공방이 펼쳐지는 와중에 탄알처럼 소진되는 남북 병사들의 오직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묘사한다.
고수와 신하균이 국군 장교로 중심을 잡고, 고창석 류승수 류승룡 김옥빈 등이 연기력을 보탠다. 산 하나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해낸 고지 전투 장면이 처절하고, 남북 병사들이 참호에서 즐기는 망중한이 넉넉한 웃음을 안긴다. 승리라는 목표를 잊은 채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병사들, '2초'라는 별명의 북한 저격수와 국군의 대치 등이 볼거리와 긴장감을 준다.
정전협정 발효를 앞두고 펼쳐지는 마지막 일전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포탄으로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몸을 비추며 전쟁이 그저 권력자들의 땅 따먹기에 불과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거대한 스펙터클에 반전 메시지를 심은, 충무로 역대 최고 전쟁영화라 해도 과하지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드라마 '선덕여왕'의 박상연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다. 장 감독은 "시나리오를 건네 받았을 땐 '의형제' 후반 작업 중이라 거절하려 했는데 이런 전쟁 영화 나중에 또 만날 수 있겠냐는 생각에 연출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남북한 병사들을 사람으로서 똑같이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전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와 사진들을 많이 봤습니다. 무엇보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내려고 애썼죠."
'고지전'은 제목처럼 고지가 중요한 영화다. 스태프들이 "촬영 끝나면 보약을 공동구매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지형이 험한 경남 함양군 백암산이 무대가 됐다. 2009년 산불로 민둥산이 된 곳이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에 이어 이번 영화도 시나리오 원작자가 따로 있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고집하는 감독들이 많은 충무로에선 보기 드문 모습이다. 장 감독은 "영화를 만들수록 감독이 되기 전 써놓은 시나리오가 참 재미없게 느껴진다. 투자자나 제작자에게 내 시나리오를 보여준 적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꼭 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겠다 식으로) 정해놓지 않은 게 오히려 나에겐 좋은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호사다마라 할까. '빈집' 등으로 유명한 김기덕 감독이 올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상을 수상한 '아리랑'에서 장 감독을 배신자라고 실명 비판하며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장 감독은 김 감독 연출부 출신. '영화는 영화다'는 김 감독의 시나리오를 밑바탕 삼았고, 김기덕 필름이 제작했다. 그는 '의형제'를 만들며 김 감독 곁을 떠났다.
억울한 심정도 있을 법 한데, 장 감독은 "제 입장을 다 말씀 드릴 수 없고, 과정이 어찌됐든 김 감독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제자로서 죄송하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사랑을 했다. 남녀가 사랑해서 생긴 일을 주변에 다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아리랑'을 볼 거냐고 묻자 그는 "봐야죠"라고 답하며 눈가의 물기를 손으로 닦아냈다.
"'아리랑' 예고편을 인터넷으로 봤고 감독님이 직접 부르신 노래를 들었어요.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 슬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제가 잘했든 못했든 제자로서의 부족함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셨던 듯해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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