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이 잔뜩 매서워졌다. 유럽 국가의 신용등급을 가차 없이 내리고, 미국에 대해서도 잇따라 등급 강등을 경고한다. '불 난 집에 기름 붓느냐'는 당사자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이익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자성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매서워진 신용평가
유럽의 부실국가를 향한 국제 3대 신용평가사의 공세는 파상적이다. 피치는 13일(현지시각)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을 'B+'에서 정크(투자부적격) 등급인'CCC'로 3단계나 내렸다. 이 등급은 디폴트(채무불이행) 등급 직전 수준이다. 그리스의 디폴트 우려가 재확산되는 와중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무디스도 5일 포르투갈, 그리고 12일에는 아일랜드의 등급을 투기 등급으로 강등(Baa3 →Bal)했다. 특히 아일랜드는 'PIGS' 국가'중에서 그나마 상황이 진정되는 와중에 당한 조치여서 상당히 의외라는 게 시장 반응이다. 유럽 재정위기가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전염될 수 있다는 우려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3개 신용평가사 중 S&P는 가장 선제적으로 등급 강등을 강행해온 곳. 특히 그리스가 재정 긴축안 통과로 한숨을 돌릴 무렵인 5일, "민간 투자자가 보유한 국채를 차환하는 방식은 그리스를 '선택적 디폴트'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3대 신용평가사들은 앞다퉈 "미국이 정부의 채무 한도를 증액하지 못할 경우 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무디스는 13일 등급 강등이 가능한 '부정적 관찰대상'에 포함시키며 실제 액션까지 취했다.
엇갈리는 해석
신용평가사의 180도 달라진 행보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처신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대한 사전 경고는커녕 고객인 월스트리트 은행 편에서 뒷북 대응만 일삼는 바람에 당시 신용평가사의 신뢰성은 크게 실추됐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의 강공 행보에 대해, "리먼브라더스 사태에 대한 반성으로 더 이상 신뢰를 추락시킬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 재정위기의 진원지가 유럽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미국에 대해서는 경고장을 보내는 데 그치고 있지만, 유럽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를 쏟아내고 있다"며 "무디스와 S&P 등이 미국계라는 점에서 미국측 이해를 좀 더 반영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럽측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다. 특히 유럽연합(EU) 수뇌부들은 고비 때마다 기름을 붓는 신용평가사의 행태에 격노한다. 3월과 6월 EU 정상회의를 불과 며칠 앞둔 상황에서 무디스와 S&P가 그리스 신용등급을 강등했고, 이번에도 긴급 정상회의가 추진되는 상황에서 재를 뿌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영국계인 피치는 무디스나 S&P와 달리 이탈리아에 대해 "펀더멘털의 문제가 아니다"고 옹호하는 등 미묘한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등급 강등에 호응하지 않는 것도 갈등의 한 단면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신용평가사들이 선제적 조치에 나서는 데 반해, 오히려 시장에서는 이를 신축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국가의 국채를 유럽계 금융기관이 여전히 담보로 받아주고 있는데, 이는 신용평가사와 이를 불신하는 유럽 자본과의 신경전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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