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의 시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이 구절로 시작되는 새 시집의 주인공은 최승자(59) 시인이다. 그는 지난해 8월 등단 31년 만에 첫 문학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이제 병원에 안 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10월께 아예 포항의 정신과 병원에 입원했고 올해 초에는 경기 이천의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 없이는 타인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 그곳에서 써 내린 시 60편을 담은 시집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발행)이 13일 출간됐다. 물>
지난해 1월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지성사 발행)으로 11년의 침묵을 깬, 최승자 시인의 귀환은 그를 기억하던 이들에겐 반가움에 앞서 슬픔과 충격을 함께 몰고 온 사건이었다. 치명적인 허무의 독으로 1980~90년대 숱한 젊은이들을 감염시켰던 이 특별한 시인이, 시의 시대가 저묾과 동시에 독자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던 2000년대에 홀로 고시원을 전전하며 극도의 가난과 싸우고 정신적 질병까지 앓았던 사실이 새삼 알려졌기 때문이다. 쓸쓸해서>
몸과 정신의 벼랑 끝에서 돌아온 그가 환기시킨 것은 잊혀졌던 최승자란 이름 석 자만이 아니라 시적인 무엇이었다. <쓸쓸해서 머나먼> 은 지난 한 해만 1만 부 이상이 팔리며 근래 나온 시집으로는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지난해 8월 지리산문학상과 11월 대산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문단 안팎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시 낭독회를 열기도 했지만 그의 병은 진행형이다. 천년의시작의 김태석 대표는 "평소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괜찮으신데, 때로 환청이나 환각 증세가 있는 것 같다"며 "어제 시집 출간 건으로 통화했는데, 웬만하면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만 외출이 안 돼 못 나온다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쓸쓸해서>
침묵의 그 기간 서양 신비주의와 노장(老莊) 사상을 공부했다던 얘기대로 새 시집에도 노자와 장자, 허무에 대한 언급이 많다. '노자의 눈물과/ 장자의 한숨 사이에서/ 나는 숨을 죽인다'('어느 날 어느 날' 중), '지극한 無로서의 虛를 위하여/虛無가 아니라 無虛를 위하여/허름한 생각들은 아주 훌륭한 옷이 된다'('하늘 도서관' 중).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더 쓸쓸한 날에는 장자도 有毒(유독)하다"며 "그렇게 쓸쓸해 할 때의 나는 始源病(시원병)에 걸린 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始源病이라는 또 다른 증세까지 겹쳐 앓고 있는 셈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의 독성은 예전에 비해 오히려 묽어졌고 시어들도 한결 간결하고 투명하다.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예전의 그 격렬했던 자기 부정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詩는 가장 여리고/ 詩는 가장 맹독성이다.'('神은 오후에 하늘은 밤에'중) ' '한없이 여린'을 찾고 있다/ 폭염과 혹한 그 너머에 있는/ '한 없이 여린'을 찾고 있다'('한 없이 여린' 중)
'가장 여리면서 가장 치명적'이랄 수 있는 시인의 몸이 갇힌 곳은 여전히 정신 병동이다. 이곳에서 부쳐진 이 시집은 그러니까 아직은 그가 반쪽밖에 돌아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산물일 것 같다. '사프란으로 떠난/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다시 돌아왔지만/사프란으로 떠난 그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나는 다시 돌아왔다' 중)는 구절처럼.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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