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5일, 장마철을 앞두고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던 충남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에서 땅을 파던 인부의 삽날에 뭔가 딱딱한 게 닿았다. 조심스레 파내려 가던 중 6호분과 비슷하게 가지런히 쌓은 벽돌들이 나타나자 공사는 중단됐다. 급히 발굴조사단이 꾸려졌다. 발굴 착수 이틀째인 7월 8일 오후 드디어 무덤 입구가 드러났고 조사단이 안으로 들어갔다. 조사단은 바닥에 놓인 두 장의 돌판 중 하나에서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는 명문을 읽었다.‘사마왕’, 바로 백제 무령왕이다.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인 무령왕릉은 그렇게 우연히 발견됐다.
무령왕릉 발굴은 20세기 한국 고고학 발굴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된 유일한 예다. 도굴당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이라 학계는 더욱 흥분했다.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머리에 쓰는 금제 관 장식, 중국 도자기 등 108종 4,687점(국보 12종 17점 포함)의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무덤 구조가 백제식이 아니라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전축분ㆍ塡築墳)인 점은 백제의 국제성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령왕릉 발굴은 사상 최악의 졸속 발굴이기도 하다. 여러 달을 해도 모자랄 발굴을 무덤 개봉에서 유물 수습까지 겨우 17시간만에 해치웠다. 발굴 현장에 몰려든 취재진과 구경꾼 등쌀에 조사단은 철야 작업을 강행, 큰 유물만 대충 챙기고 나머지는 자루에 쓸어 담아 나왔다.
졸속 발굴의 후유증은 두고두고 연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예컨대 무령왕릉에서 나온3,000여개의 구슬은 낱알로 마구 섞인 채 수습되어 본래 형태나 용도를 알 길이 없다.
교양서 을 쓴 고고학자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유물도 팔자가 있다”고 말한다. 무령왕릉도 마찬가지여서 시대에 따라 그 가치에 대한 평가나 이미지가 변해왔다고 설명한다. 무령왕릉의 국제성만 해도 그렇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1970, 80년대는 무령왕릉의 구조가 중국식이고, 출토 유물에 중국제 도자기, 왕과 왕비의 목관 재료인 일본산 금송 등 수입품이 많은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외국 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백제의 개방성과 ‘코스모폴리탄’ 무령왕이 주목받고 있다.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소장하고 상설 전시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이 앞장서서 특별전시회와 학술회의,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원로 학자 초청 좌담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특별전 ‘무령왕릉 신발견’(가제)은 10월 7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한다. 무령왕릉 출토품 중 미공개ㆍ미보고 유물을 중심으로,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해 밝혀진 새로운 성과들로 꾸밀 예정이다. 10월 28, 29일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는 한중일 학자들이 참여해 무령왕릉을 재조명한다. 좌담회는 8월 초로 예정돼 있다. 10월과 11월, 일반인을 대상으로 여섯 번에 걸쳐 특별 연속강좌도 연다.
무령왕릉은 발굴 후 일반에 개방했으나 관람객 발길에 바닥 벽돌이 깨지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기자 1997년 폐쇄됐다. 대신 무령왕릉이 속한 송산리 고분군 바로 옆에 자리잡은 모형관에서 모형으로 볼 수 있다.
공주시 문화재관리소는 현재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들의 내부 환경 변화에 대한 정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내년까지 2년 간 진행하는 이 작업은, 현재 월 1회 사람이 들어가서 측정하는 내부 온도와 습도를 밖에서 측정해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하고, 이를 토대로 고분 보존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파악하는 것이 목표다. 무덤 구조의 안전 진단과 내부 미생물 조사도 포함하고 있다. 고분 내부 환경에 대한 최초의 정밀 조사인 이 작업의 결과는 다른 고분들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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