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전의 서울 쪽 문단 분위기를 명동 일대 풍경을 통해 들여의 다보겠다. 당시 소공동에서 ‘하루삥’이라는 다방을 하던 장만영 시인이 다시 충무로로 옮겨와서 ‘비엔나’라는 다방을 열었다. 이 다방에는 김기림, 조병화, 김용호, 김경린, 선우휘, 김광균, 김병욱 등이 드나들었다. 장만영이 ’산호사‘라는 출판사를 하며 호화판 시집도 발간한 인연으로 시인들도 들락거렸다.
그런가 하면 ‘비엔나’ 맞은편 골목에는 ‘휘가로’라는 다방이 새로 문을 열어 시인 전봉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살다시피 했다. 시인 전봉건의 형인 그는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자살해 문단에 충격을 던졌다. 더러는 시인 김수영이 노란 스웨터와 멋진 양복에 넥타이에 캡까지 쓰고 나와, 특유의 큰 눈동자를 뚜웅하게 벌려 뜨고 심각한 얼굴로 혼자 앉아 있곤 하였다.
유심히 그 김수영을 보아오던 한 손님이 그 무렵 어느 날인가는 잠깐 같이 나가자고 하여, 김수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따라 나섰다.
이 광경을 본 다방마담이 조금 뒤숭숭해 하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잠시 뒤에 김수영은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누구세요?” 하고 마담이 묻자, 김수영이 뿌루퉁하게 말했다.
“뭐, 형사라나. 내 얼굴과 내 옷 차림이 대관절 어디가 어째서 수상 하다는 거야?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잖아. 무슨 사건이라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지. 기분 잡치게.”
또 근처에는 ‘수선사’라는 출판사가 생겨 주로 서북 쪽의 계용묵, 백철, 정비석, 허윤석 등이 드나들었고, 관북 쪽의 신상옥은 ‘악야’라는 영화를 감독 하느라 틈만 나면 그 작품의 저자인 김광주와 만나 쑤군덕거리곤 하였다.
한편 명동 건너편 경향신문사 옆에는 ‘풀라워’는 널찍한 레스토랑 같은 다방이 문을 열어 김동리, 조연현, 박목월, 조지훈, 곽종원을 비롯해 주로 경상도 쪽 ‘청년문협’ 문학인들이 모이곤 하였다. 다방이 원체 넓고 커서 이 무렵의 출판기념회는 대부분 이 곳에서 열렸다. 김동리의 ‘황토기’, 서정주의 ‘귀촉도’ 등의 출판기념회도 여기서 열렸다. 홍효민의 소설 ‘인조반정’의 모임에서는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 조금 늦게 술이 취해 어쩌다 들어선 정지용이 냅따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 ‘효민의 밤’은 다 뭐고, ‘인조반정’은 또 뭐냐. 뭐? 역사소설이라구? 참 가관이다 가관. 그런걸 소설이라고? 당신네들도 참 웃긴다.”
그러자 수모를 당한 홍효민보다, “여기까지 와서 이 무슨 행패요” 하고 그 모임에 모인 손님들이 더 화통을 터뜨리며 일어났다.
보다 못해 젊은 누군가가 정지용을 밖으로 끌어냈다. 이리하여 실랑이는 문 밖 거리에서까지 이어지고, ‘효민의 밤’ 모임은 어색하게 끝났다.
바로 그 즈음에 좌우합작이니 남북협상이니 소리가 온통 사태를 이루더니 1948년 4월 19일 김구, 김규식 등이 3ㆍ8선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이 신문마다 대문짝만 하게 났다.
당시 명동에는 신문기자들도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이 소식이 가장 먼저 알려진 곳도 명동 거리 다방과 대폿집들이었다. 김구 선생을 따라 평양까지 갔다가 온 신문기자들 태반은 하나같이 열들을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남북 협상, 웃기는 소리였다. 북한의 계략이었어. 저들의 계략에 넘어가 허행했던 김구 선생만 딱 하게 됐어. 김구 선생이야, 오로지 애국 애족 일념뿐이었는데.”
대폿집들에서 신문기자들이 술들이 취해 호통을 치며 소리를 질러 여느 손님들도 하나같이 침통해 있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은 지 불과 스무날 뒤에 5ㆍ10 선거가 치러져 제헌국회가 열리고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 하게 된다.
당시 정부 수립 경축식 실황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축배를 들고자 명동 쪽으로 나와 우리 문학인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눌 때 한쪽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는 남북의 분열, 국토 양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라고 하신 김구 선생의 노선을 나 같은 사람은 지지하기 때문에, 노형들의 그 경축 기분, 나는 반갑지 않소이다.”
그렇게 반대하고 나서는 손님들도 있어, 이 무렵 한동안은 좌, 우, 중간 사람들이 더러는 한데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은 북한대로 그 직후인 9월 9일을 기해 ‘북조선 인민위원회’라는 단독 정부를 수립, 김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던 벽초 홍명희 같은 사람은 그 정부의 부수상 자리에 오르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 이듬해 옛날 조흥은행 (지금의 롯데백화점)의 명동쪽 맞은편에 있던 5층 건물 문예빌딩에서는 해방 후 최초의 본격적인 문학 전문지 가 월간으로 창간된다. 는 모윤숙 대표에 김동리 주간, 조연현 편집장의 진용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 건물 지하에는 ‘문예살롱’ 다방도 생겨나 저녁마다 문학인들이 모여들었다.
문예살롱 동편의 명동 골목에는 ‘동방살롱’이 문을 열어 이해랑, 황정순 등 연극 영화인들을 비롯해 음악인, 화가들과 문학인으로는 이봉래, 양명문, 박인환, 백철, 조애실 등이 드나들었다. 또 거기서 코 닿는 곳에는 소설가 이봉구가 노상 지키던 다방 ‘모나리자’와 ‘은성’ 술집이, 그리고 다시 그 남쪽 명동파출소 뒤쪽 골목으로는 젊은이들이 많이 드나들던 음악다방 ‘돌체’가 성황을 이루며, 본격적으로 남한 문화계가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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