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정치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반목과 대결로 점철됐다. 단종을 제거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한명회, 신숙주, 이극돈 등이 주축이 됐던 훈구파와 이성계의 역성 혁명을 배척하며 영남 일대를 배경으로 성리학에 몰두했던 사림파가 성종 세대에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이들의 대결은 사화(士禍)를 불러 일으켰다. 연산군에서 명종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인 무오, 갑자, 기묘, 을사 사화 중 첫 번째가 연산군 4년에 발생한 무오사화이다. 1498년 7월 12일 사림파였던 춘추관의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기록한 것을 두고 훈구파의 유자광이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며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됐다. 조의제문이란 성종 시대에 조정에 중용된 사림파의 거목 김종직이 쓴 글로 항우에 의해 죽은 중국 초나라 왕 의제(義帝)를 추모하는 글로 이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을 비유한 것이었다.
1492년 김종직이 사망하고 연산군 대에 이르러 조정은 정여창, 김일손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와 유자광, 이극돈이 주도하는 훈구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연산군 4년에 성종실록이 편찬되는데 편찬 책임자가 이극돈이고 사관은 김일손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궁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매일 기록하는 일종의 궁궐일지가 바로 사초이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는 절대 비밀에 비쳐져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이 금지됐다. 사초에 적힌 을 발견한 이극돈은 당시 훈구파의 수뇌인 유자광에 이를 알렸고 사림파를 제거할 기회를 얻은 유자광은 연산군에 상소를 올렸다. 원칙과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파에 부담을 느끼던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 다시 형을 집행하는 부관참시를 명했고 김일손은 능지처참 당했으며 사림파 대부분은 귀양에 처해졌다. 1498년 7월 무오년에 선비가 화를 당했다고 하여 무오사화라 불린다. 계보와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반목과 대립을 계속하다 보면 이는 필히 비극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정가에도 통용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