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이한음 옮김/까치 발행·584쪽·2만5,000원
이제 이 병은 더 이상 남이 알까 쉬쉬해야 하는 부끄러운 질병이 아니다. 인간 죄악에 대한 신의 천벌도 아니다. 미국 여성 3명 중 1명, 남성 2명 중 1명이 죽기 전에 한번은 걸리게 될 질병. 미국인의 4분의 1, 전 세계인의 15%를 죽음에 이르게 할 친숙한 질병. 바로 암이다. 암은 이제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생의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시대의 '반려질병'이 됐다.
컬럼비아대 의대 교수의자 전문의가 쓴 이 책은 4,000년에 걸친 암의 역사를 집대성한 '전기(傳記)'이다. 수잔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 에서 이 병에 덧씌워진 온갖 그릇된 신화를 벗겨낸 이래, 암을 '그저 하나의 질병'으로 과학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테제가 의학ㆍ지식계의 담론 자장을 형성했다. 이 책은 이 자장 안에서 암의 역사를 집대성한 방대하고 치밀한 교양서이다. 은유로서의>
'암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이 책은 암이 인류사의 어느 단계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암을 이해하는 시각은 반만년 가까운 시간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우리가 현재 암의 역사의 어느 단계에 도달해 있는지를 꼼꼼히 살핀다.
암에 해당하는 단어가 의학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400년경 히포크라테스 시대였다. 부푼 혈관들에 움켜쥐듯이 둘러싸인 종양을 보고, 모래 구멍에서 다리들을 원형으로 펼치고 있는 게의 이미지를 떠올려 게를 뜻하는 그리스어 카르키노스(karkinos)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는 유방, 피부, 턱, 목, 혀의 암 등 눈에 잘 띄는 피상적인 종양만을 다뤘을 뿐 악성종양과 비악성종양의 차이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열하려는 자율적인 의지를 획득한 세포들의 병리학적 증식"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암에 대한 이해를 기초한 이는 백혈병에 이름을 붙인 19세기 독일 의사 루돌프 피르호다. 이어 20세기 초 미국의사 시드니 파버가 화학물질을 통해 백혈병과의 싸움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암과의 투쟁사가 시작된다.
암의 치료는 시대에 따라 수술과 화학요법이 번갈아 가며 경쟁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유방절제술로 인해 발전했던 수술을 통한 암 치료는 환자의 외모를 끔찍하게 망가뜨릴 뿐 아니라 효과도 들쭉날쭉하다는 한계에 부닥쳤다. 그 결과 다제 화학요법 치료가 다시 각광받게 되지만 이번엔 부작용이 문제가 됐다.
저자는 "암의 생물학적 지식조차도 우리 삶에서 암을 완전히 박멸해줄 가능성은 적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없애기보다는 수명을 연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암과의 전쟁은 승리를 재정의함으로써 "이기는" 편이 최선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청난 분량의 의학교양서이지만, 딱딱한 과학적 정보들로만 가득 찬 현학적 책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환자들과 함께 사투를 벌인 의사로서의 경험을 가슴으로 풀어 쓴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 덕분이다. 질병의 과학과 시를 우아하게 엮은 저작이라는 미국 내 평가가 과찬이 아니다. 올해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부문 수상작.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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