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아 분주했던 일상을 정리하고 일본행을 계획하다 보니 문득 오자와 준코(小澤恂子) 여사가 떠올랐다. 도쿄에 전화해 건강을 확인하고 방문할 것을 약속했다. 오자와 여사와의 인연도 올해로 벌써 6년째. 2005년 무용가 조택원 선생의 일대기를 화보집으로 발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자료 수집 차 일본에 갔다가 그를 처음 만났다.
평생 무용을 해온 무용가라서 그럴까, 89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꼿꼿한 자태의 건강한 모습이 놀라웠고, 같은 무용가라는 느낌 때문인지 첫 만남인데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조택원을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젖기도 했다.
오자와는 패션모델 출신 일본무용가다. 우연한 기회에 조택원의 춤추는 모습에 반해 그에게 입문해 조선춤을 배웠다. 그 후 예술적 동지이자 연인으로 발전해 20여 년을 함께 살았다. 50년대 초반 유럽 순회공연 때 아이를 가졌으나 공연을 위해 포기했다는 아픈 사연도 있다. 60년대 초반 조택원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오자와는 여태껏 과거 추억을 벗삼아 홀로 지내고 있다. 무용연구소를 겸하고 있는 그의 집은 온통 인간 조택원의 체취로 가득 차 있었다.
근대 신무용의 대가로 칭송되는 조택원은 사실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1907년 함경도 함흥 명망가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함흥군수를 지냈고, 아버지는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었는데, 한일합방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택원은 10세 때 서울로 이사와 휘문고보와 고려대 전신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휘문고보 시절 뒤쳐진 학업을 위해 시인 정지용을 과외 선생으로 모셔 특별수업을 받을 정도로 학구적이었다고 한다.
무용가 조택원은 한마디로 근대 '모던 보이'였다. 16세 때 토월회 무대에 나가 '코박춤'을 추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휘문고보, 보성전문 시절엔 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상업은행에 스카웃돼 전국정구선수권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하는 기록도 세웠다. 그가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영화, '미몽(迷夢)'에 출연한 사실도 이채롭다. 연극, 영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근대 대표적 엔터테이너였던 셈이다.
무용가로서 활약은 더욱 눈부시다. 그는 일본 근대무용 선구자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춤을 체득하고 서양에 유학한 후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했다. 전통의 현대화와 서양무용의 한국화를 화두로 서구식 극장무대에 걸맞은 새로운 공연미학을 추구하며 한국춤의 근대화를 주도하는데 앞장섰다. '춤은 움직이는 사색, 즉 무상(舞想)'이라 정의 내린 조택원은 <가사호접> <춘향조곡> <학> <신노심불로> 등 주옥 같은 명작을 남겼다. 춤이 단순히 기예(技藝)의 수준을 넘어 이성적 사유의 산물임을 입증한 것이다. 신노심불로> 학> 춘향조곡> 가사호접>
해외에서의 활동은 더욱 놀랍다. 그의 활동무대는 주로 일본과 프랑스, 미국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전문잡지 <미시> 후원으로 200여 회 공연을 하고,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 세르주 리파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그리고 15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며 한국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미국 전역에 전파했다. 특히 49년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된 <신노심불로> 는 서양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렇듯 엄청난 업적이 있음에도 조택원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자와는 조택원을 재발견하는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수십 년간 소장해 온 조택원의 춤의상과 사진, 팸플릿 등 자료 일체를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2006년 화보집 <춤의 선구자 조택원> 이 발간됐고, 그의 업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숨결이 깃들어 있는 자료를 남에게 선뜻 내준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춤의> 신노심불로> 미시>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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