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즐겨보는 내게 금요일은 참 심심한 날이다. 대부분 드라마가 월화, 수목, 주말 세트로 묶여 있어 금요일에는 별다른 볼거리를 찾아보기 어려워서다. 그런 나를 지난 1년 간 매주 금요일 밤마다 TV 앞에 붙잡아 놓은 이들이 있었다. 금요일 밤이면 나는 순박해 보이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두 청년에 사로잡혔다. 허각과 백청강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자투표를 날리는 아줌마 팬이 되었고, 내가 응원하는 그들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다. 잘생기고 세련된 다른 참가자를 응원하는 중학교 2학년짜리 딸을 구슬려 문자를 보내게 했고, 남편에게도 강권했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까지 응원을 부탁했다.
그들이 1등을 했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내가 그들을 응원한 것은 그들의 노래가 좋기도 했거니와 어려운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며 도전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배경과 조건 없이 오로지 꿈과 실력만으로 그 자리까지 온 그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미디어가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과장이나 왜곡의 장치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들이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을 기꺼이 즐겁게 누렸다. 일상에 지쳐 혹은 나이를 먹어가며 더 이상 꿈을 꾸려고도 않고 꿈꾸는 법조차 잃어버린 나에게 그들은 꿈꾸고 도전하는 일의 즐거움과 설렘을 전해주었다.
공부는 좋은데 시험이 싫어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종종 투정을 부리는 딸이 기말고사를 보고 있다. 꿈꾸는 법을 가르치지도 않고 꿈꾸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 학교에 남은 것은 치열한 경쟁뿐이다. 그래서 한창 빛나야 할 나이의 딸아이는 성적, 점수, 평가 이런 것들에 벌써 많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다. 학교는 이제 꿈은 없고 경쟁만 있거나, 꿈이 있어도 도전하기 어려운 공간이 돼 버렸다. 딸아이는 꿈꾸는 일에서 오는 감동과 아름다움을 자신의 경험과 성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40대 중반 엄마처럼 TV 속에서만 구경하고 있다. 나는 그런 딸아이가 안쓰럽지만, '그래도 시험은 잘 봐야 한다'는 말을 무한반복 재생하는 엄마를 벗어나질 못한다. 아이를 모범의 틀 안에 가두면 꿈꾸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딸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 '엄친딸'이기를 바라고 있나 보다.
제도교육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보내거나 조기유학을 보내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무한경쟁과 시험에서 어떻게 아이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대한민국 보통 아줌마인 나는 고민만 한다. 제도교육을 거부하지도 유학을 보내지도 못하는 우리 부부는 기말고사가 끝나는 대로 딸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기타를 사주기로 했다. 기타 하나가 아이 인생을 바꿔놓기를 바라지 않고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나는 딸아이가 기타를 배우면서 경쟁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도전의 설렘과 즐거움을 경험하면 좋겠다.
최근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꿈은 사라지고 경쟁만 난무하거나, 꿈은 충만할지 모르나 감동은 없는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어떤 도전들은 사소하고도 무모한, 그러면서 위험하기까지 한 오락거리가 돼버렸다. 나는 이제 꿈을 꾸는 일의 즐거움과 설렘, 벅찬 도전의 감동을 TV가 아닌 생활 속에서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서 찾고 싶다. 딸아이의 서툰 기타 연주에 설레고 싶다.
김영주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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