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조상 유품을 생명같이 지켜왔습니다."
5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지난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북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올라온 경주손씨 우재 가문의 종손 손성훈(56)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대대로 내려온 문서 2,000여점을 기탁한 곳이 첨단 시설을 갖추고 새로 개관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 문헌과 사대부 집안 등 민간의 고문헌을 보관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이 이날 연구원 경내에서 개관식을 갖고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한중연은 1981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으로부터 장서각 소장 도서를 위탁 받아 관리해오다 2009년부터 226억원을 들여 지상 3층, 1만128㎡ 규모로 새 건물을 마련했다. 고문서를 과학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항온항습 시설과 문서 보존 처리실, 원본 복제화를 위한 디지털 장비 등을 두루 갖췄다.
장서각이 보관하는 문서는 우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실의궤, 동의보감을 비롯해 왕의 시문과 글인 어제(御製)와 어필(御筆), 국왕문집 및 왕실의 족보인 왕실보첩 등 왕실 관련 문헌 9만여점. 규장각(奎章閣)이 조선시대 국가 통치 자료를 보관한 곳이라면 장서각은 왕실 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모은 곳이다.
장서각은 여기에다 1997년부터 사대부 집안 등 민간에 흩어진 고문헌을 수집해 현재 43개 집안에서 3만5,000여점의 문헌을 기탁받아 보관하고 있다. 우재 가문이 보관해온 국보 제283호 <통감속편> (通鑑續編)을 비롯해 전주이씨 완양부원군 종가가 기탁한 한석봉 필체의 '완양부원군 이충원 호성공신교서'(完陽府院君 李忠元 扈聖功臣敎書) 등 보물 9점도 포함돼 있다. 통감속편은 원 진경이 쓴 중국역사서인데 기탁받은 책은 1423년에 인쇄된 것으로 고인쇄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사 연구의 중요자료다. 통감속편>
이날 개관식에는 장서각에 문서를 기탁한 가문의 종손 종부 100여명이 함께 했다. 이들은 오랜세월 문서를 보관하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남다른 소회에 젖었다. 진주정씨 우복 가문의 정춘목씨는 "사당에 있던 문서들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등 도난을 많이 당해 기탁하게 됐다"면서 "마음이 가볍기는 한데, 허전함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기탁을 통해 새삼 문헌의 가치를 알게 됐다는 얘기도 나왔다. 무안박씨 무의공 가문의 박연대씨는 "1992년 부친이 돌아가신 뒤 전적 관리도 고민이었지만 내용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며 "기탁한 문헌의 한글본이 계속 나오고 있어 집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고성이씨 임청각가문의 이항증씨는 "옛날 어른들에게 전설처럼 들었던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새삼 놀랐다"고 말했다.
실제 서계 박세당(1629~1703)의 시문과 간찰을 모은 <서계유묵> 과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행서와 초서 필적인 '동춘당필적' 등은 기탁 후에 연구진의 조사를 통해 보물로 지정됐다. 특히 우재 가문이 2003년 기탁한 문헌 중에는 그동안 이름만 전해지던 원나라 최후 법전인 <지정조격> (至正條格)의 세계 유일본이 발견됐다. 지정조격> 서계유묵>
이들 가문이 맡긴 고문서는 조선시대 문화의 속살을 더욱 깊이 연구하는 밑거름이다. 파평윤씨 소남 가문의 문헌 2,000여점엔 소남 윤동규(1695~1773)가 스승인 성호 이익(1681~1763) 등에게 보낸 편지들이 많은데, 성호학파 내 학문적 소통과 충돌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1858~1932)의 후손인 고성이씨 임청각가문의 문서엔 근대 독립운동사 연구에 도움을 줄 자료가 풍부하다. 김학수 국학자료실장은 "명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문서를 훌륭히 보관해온 이런 가문들을 '고문서 명가'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장서각은 개관 기념으로 이날부터 8월 말까지 주요 소장품을 선보이는 '조선의 국왕과 선비' 특별전을 연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