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극 형식에 예술가의 창조와 고뇌, 사회적 소수자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녹여 낸 연극이 있다. 어렵지 않을까? 웬걸, 뜻밖에 관객 반응이 나쁘지 않다. 유명 연예인이 나오는 뮤지컬도 아닌데 객석 점유율은 70% 가까이 된다. 영국 시인 W.H. 오든과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의 가상 만남을 극화한 연극 ‘칼리반의 날’을 준비하는 배우와 스태프의 모습을 그린 연극 ‘예술하는 습관’(The Habit of Artㆍ연출 박정희) 이야기다.
비결은 원작자인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의 탄탄한 대본과 중견 배우들의 호연에 있다. 지난달 22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이 작품에서 특히 ‘칼리반의 날’ 주인공 W.H. 오든을 연기하는 한물간 배우 피츠로 분한 주연 배우 이호재(70)씨의 연기에 관객들은 때로 폭소를 터뜨려 가며 집중했다. “연극의 메시지란 본 사람이 느낀 그대로 믿는 게 정답”이라며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를 3일 저녁 공연 후 만났다.
_그간의 진지한 캐릭터에서 벗어난 말 많은 한물간 배우 피츠 역이 뜻밖에 잘 어울린다.
“색다르다는 의견도 있지만 장난하는 거냐는 반응도 있더라. 젊을 때는 미국 희극작가 닐 사이먼이 쓴 코미디에 많이 출연했다. 희극 연기는 배우만 긴장을 푸는 게 아니라 관객도 이완하게 해야 하니 사실 비극보다 어렵다. 이번 역할은 피츠일 때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지만 오든일 때는 극의 중심을 잡아야 해서 더 힘들었다.”
_극 중 ‘칼리반의 날’ 준비 과정이 실제 연습실 풍경과 유사한가.
“그 모습이 연극 그 자체다. 물론 본래 배우는 역할의 해석을 연출자와 의논한다. 피츠처럼 노배우가 작가한테 직접 딴죽을 거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피츠의 요구는 창피스럽게 단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지 않나.”
_예술을 습관적으로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처음 대본을 접했을 때 예술을 습관적으로 한다니 예술을 홀대하는 건가, 싶었는데 영국인들에게 오든과 브리튼은 대표적인 예술가니까 그런 제목을 붙인 듯하다. 습관적으로 하는 예술인데도 작품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 그들을 오히려 영웅시한 표현인 셈이다.”
_핵심 메시지 파악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언뜻 예술가의 삶이 주제 같지만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소외계층의 이야기가 아닐까. ‘칼리반의 날’에서 동성애자 오든이 성적 쾌락을 찾기 위해 부른 콜보이(남창) 스튜어트처럼 사회적 소수자의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스튜어트가 주인공이다.”
_오든에게서 동성애자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여성스러운 말투는 느끼지 못했다.
“내가 맡은 오든은 동성애자 중에서도 남성스러운 쪽이다. 브리튼(양재성 분)이 여성스러운 쪽이지.”(웃음)
_반세기 가까이 정말 습관으로 느껴질 만큼 연기를 해 왔다.
“미술이나 음악처럼 혼자 하는 예술과 달리 연극은 협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행히 매너리즘의 걱정은 덜하다. 작가가 쓴 작품을 연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연기자가 표현하는 게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이론에 정통한 젊은 연출가들과 일하는 과정에서도 참 많이 배운다.”
_다음 작품은?
“국립극단이 8월에 무대에 올리는 연극 ‘보이체크’에 출연한다. 이제 좀 쉬운 역할을 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어려운 작품만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주, 죽겠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그는 ‘예술하는 습관’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의 술자리로 쌩하게 달려 갔다. “후배들에게 ‘배우 이호재’보다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자연인 이호재’로 남는 게 더 좋다”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세상 위대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싶다”던 극 중 험프리 카펜터의 대사가 떠올랐다. 공연은 10일까지.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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