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감독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무협영화에 도전한 첫 작품이 '여협 매인두'(1970)였다. 회사 측에서 제공한 시나리오를 검토해 보니 내용이 너무 단조로웠다. 좀 더 추가하고 수정한 후에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협 매인두'는 홍콩여배우 초교가 맹렬한 주인공 여협으로 열연했다. 무술 지도는 '방랑의 결투' 무술 지도를 했던 하인재가 담당했고 청룽(成龍)이라는 열아홉 정도 되는 어린 청년이 스턴트맨을 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주인공과 집단으로 몰려나와서 싸우는 검객 중 하나에 불과한 무명의 역할이었다. 이 친구가 어리다 보니 장난기가 많아 내가 가끔 나무랐던 기억도 있다.
장난기 많은 어린 청룽 외에도 '여협 매인두'에서는 일본인 스턴트맨 다섯명이 출연 했다. 이들은 중국인들이 잘 못하는 무술 테크닉을 새롭게 시도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작품을 완성해놓고 보니 완성도에 있어서 다른 중국감독하고는 조금 다른 새로운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전유물인 무협영화 '여협 매인두'를 한국감독이 연출한다니 중국감독들이 은근히 견제하고 있었는데 완성된 후에 쇼브라더스 시사실에서 공개 시사를 한 후에는 모두 나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란란쇼가 다시 제안을 했다. "다음 작품도 무협영화를 하나 해보라"는 것이다. '여협 매인두'를 하기 위해서 나는 란란쇼에게 매달리다시피 부탁해야 했는데 '여협 매인두'로 인해 이제는 거꾸로 해달라고 부탁을 해오니 난 공연히 튕겨 보고 싶었다. "난 액션 영화감독으로 들어왔는데, 왜 무협영화를 하라 그러냐"했더니, "그런 것도 능히 소화할 수 있는 감독이니까 다양하게 액션영화도 하고 무협영화도 해다오"하는 것이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내가 또 해낸 것이다.
이 때 나온 것이 '아랑곡'(1970)이다. 내가 '아랑곡'에서 중국감독들하고 차별화 전략을 가지고 싶던 것은 중국감독들이 선호하는 와이어 액션을 나도 사용하겠지만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꿈을 '아랑곡'을 통해서 환상적으로 보여주자'고 생각했고 그래서 주인공이 밤에 지붕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을 우리가 꿈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은 그런 환상적인 장면으로 그리려고 했다.
마지막 결투장면에서 언덕 위에 쓰러진 비석 같은 것을 세워 놓고 드문드문 서있는 갈대를 배치한 것도 영상미를 염두에 두고 구성한 미장센이었다. 결과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장면이었다고 평가 받았으니 흡족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로례의 상대역 왕 샤가 몸이 유연하지 못해 좀 더 힘 있고 속도감 있는 액션 장면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로례는 내게 있어 진흙 속의 진주였다.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리칭이 여주인공을 했다는 것과 남자 주인공이 로례라는 것이다. 로례는 보통 악역 조연만 해 왔고 주인공은 해 본적이 없었는데 나는 로례를 통해서 새롭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로례에게 약한 여자를 알게 모르게 뒤에서 그림자 같이 도와주는 영웅적인 역할을 맡겼다. 로례는 '아랑곡'에서 자기 역할을 잘 소화했으므로 내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 리칭도 이미 검증된 배우였다. 연기도 잘하고 인간성도 좋은 배우였으니 자기 역할에 대해서 공부해 가며 어떻게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협조해주는 훌륭한 배우였던 것이다. 진성이라는 배우는 훗날 홍콩에서 청룽처럼 유명한 배우가 되었는데, '아랑곡'에 조연으로 출연할 당시에는 무명이었다.
'아랑곡'은 특히 영국에서 대단히 반응이 좋아서 어느 영국 평론가는 "이 작품에는 어른들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하나의 판타지가 있다"고 평가하며 극찬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영화를 만드는 것에는 그런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괴한 것이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아랑곡의 혈투'라고 해서 개봉했다는 것이다. '혈투'도 아닌 영화가 혈투로 둔갑했으니 어이가 없을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위장합작 케이스였다. 나도 모르게 한국으로 가져가서 개봉했는데 기막히게도 내가 감독한 작품이 다른 사람과 공동 연출한 것으로 변질포장 되었다. 외화 쿼터제를 따 내기 위한 작품으로 얼룩져버린 것이다.
'여협 매인두'는 쇼브라더스에서 시나리오를 제공한 것이었지만 '아랑곡'(1970)부터는 처음부터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고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보다 창조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있다. 외국감독으로서 중국감독들 고유의 전용물인 무협영화를 만들면서 '뭔가 좀 다른 방향으로 시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생각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중국서적을 많이 들춰보고 연구하다 보니 중국의 신비한 이야기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여협 매인두'와 '아랑곡'이라는 무협영화의 성공으로 한국감독은 무협영화를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나는 '래여풍'(1971)을 만들게 된다. '아랑곡'에 이어 '래여풍' 역시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견지 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로례 등이 맡았고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훨씬 자신감을 가지고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래여풍'은 무협영화로서는 웰 메이드 작품이라고 평가 받았다. 란란쇼는 이 작품을 보고 "무협 영화로 정창화가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고 평하기도 했었다.
'래여풍'을 만들던 당시 란란쇼가 저녁 초대를 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래여풍'의 여주인공이 5분 정도 늦게 나타나 "교통편 때문에 늦었다"고 얘기하면서 동석했다. 내가 캐스팅한 여배우니 동석 식사도 자연스러워서 별 생각 없었는데, 느닷없이 란란쇼가 "이 아가씨가 너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일본에서도 연기 훈련 받아 일본어도 좀 하니 너와 친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을 보니 란란쇼의 의도는 그 여배우와 나를 엮어서 나를 중국감독화 함으로써 쇼브라더스에 묶어놓을 작정이었다. 나는 별 다른 대답을 안 하고 그 자리를 모면했지만, 이 여배우는 촬영 내내 노골적으로 내게 접근하며 유혹하였고 그때마다 난 여배우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거절하느라 난처했다. 촬영에 지장을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 성격상 마음에 없는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어느 스타를 동반자로 지내면서 같이 출세를 해보겠다'는 식은 절대 사절이었다.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이 떳떳하지 남의 힘을 빌려서 살아 보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란란쇼와 그 여배우의 어떤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겨우 영화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여배우와는 그 이후 그 어떤 작품도 함께 작업하지 않았다.
쇼브라더스에서 무협영화를 만드는 독보적인 외국감독으로서 나는 그들 중국계 감독들과는 '뭔가 좀 다른 방향으로 시도를 해야 한다'는 차별화에 대해 고심했고, 수많은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런 중국연구의 과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고전 무협영화와 현대물 중간 지점을 내 무협영화의 배경으로 시도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나라로 시대를 옮겼다. 서적을 통해 힌트를 얻은 것의 예를 들면, 중국 쿵푸라는 것은 대부분 동물에서 응용을 했다는 것과 독수리는 자기가 목적한 포획물이 생기면 덮쳐 들어와서 공격해서 쓰러트린다거나 호랑이가 발톱으로 공격해서 적을 쓰러트리는 등등이었다.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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