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근대서지'를 통해 첫 공개된 지역문예지 '여명(黎明)' 창간호는 1920년대 대구ㆍ경북을 중심으로 한 근대문학과 사회변혁 운동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여명'은 나도향 이상화 등의 작품 게재지로 알려지긴 했으나, 그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다가 2005년 박태일 경남대 국문학과 교수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개된 후 이번에 창간호가 발굴됐다.
'벙어리 삼룡이' 208군데나 틀렸다
우선 반가운 것은 근대 단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원본 확보다. 그간 원본이 없어 1950년대 판본에서 이뤄진 잘못된 현대어 개작이 되풀이돼 왔다. '나도향 전집'(1988)도 원본과 대조해 보니 208군데나 달랐는데, 가장 큰 잘못은 전체 7장인 작품이 6장으로 바뀐 것이다. 원본에선 작품 끝 부분 삼룡이 오생원 집에 불을 지르기 직전 장면에서 '그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자기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을 알았다'는 문장과 '그날 저녁 밤은 깊었는데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뿐이 들린다'는 문장 사이에 장이 갈린다. 박 교수는 "이는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장치로 삼룡이의 방화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효과를 주는데 이전 판본에선 장을 합쳐 작품 효과를 왜곡한 셈"이라고 말했다. 2007년 문학과지성사 판본은 잘못이 상당 부분 고쳐졌으나 '흘레'를 '혼례'로 잘못 쓴 부분은 여전했다.
이육사 형제와 이상화의 관계 시사
일제 강점기 대표적 저항시인인 이상화와 이육사 형제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도 나왔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이두파(李斗坡)란 이가 창간호에 기고한 축시 '이역의 봄'는 '오- 때의 봄은 왔는데, 우리의 봄은 언제나 올까, 이역의 봄'이란 탄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듬해 발표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박 교수는 "'두(斗)'는 육사 형제들이 쓴 호인데, 여러 점으로 미뤄 항일 항쟁에 몸을 던지고 동생 둘을 이끌던 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상화의 시는 이에 대한 화답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육사 형제들과 이상화 시인과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경북 안동 출신인 육사 형제들과 대구 출신인 이상화가 이 지역 청년 사회의 저항적 흐름 속에서 상당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1920년대 무정부주의 수용 현황 보여줘
창간호에는 김기진 현진건 변영만 등의 평론도 실려 있는데, 특히 언론인 정명준이 쓴 '크로포트킨의 예술관'은 20년대 이 지역 청년들의 무정부주의 학습 상황을 보여주는 글로 각별하다. 글은 '노동과 산업이 예술이 되고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무정부주의 이론가 크로포트킨을 찬사하는 내용이다. 1925년을 전후한 시기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변혁 사상에 대한 학습과 활동이 드높았는데, 1926년 일제가 무정부주의를 뿌리뽑기 위해 진우연맹 회원들을 잡아들인 사건도 벌어졌다.
민족주의에서 계급문학까지 포괄하는 종합 문예지
대구ㆍ경북 지역 젊은 지사 김승묵이 펴낸 '여명'은 지역문예지였으나 김승묵의 폭넓은 친교망을 통해 서울의 명망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이 두루 글을 기고해 전국적 문예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이상화 오상순 이장희 현진건 등 이 지역 출신 외에도 김기진 나도향 박종화 염상섭 이광수 최서해 등 지역 밖 문인들의 글도 상당수였다. 나라 밖에서 항일 운동을 하던 김창숙 신채호 등도 기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념적으로는 민족주의에서부터 이 지역에 막 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 계급문학과 무정부주의 성향까지 포괄했다.
김승묵은 창간호와 2호의 편집인을 대구 거주 일본인을 내세워 일제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도 했으나 저항적 색채의 글들로 인해 3호부터 검열, 삭제, 재검열 등을 겪다 결국 1927년 1월 4호를 끝으로 '여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박 교수는 "대구 경북이 지금의 보수적 분위기와 달리 일제 때는 젊은이들의 변혁적 열망이 크게 흐른 곳인데, '여명'이 이를 잘 보여주는 값진 자료다"며 "서울과 지방을 아우르는 근대문학을 재구성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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