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정권은 스스로 체제 붕괴의 씨앗을 뿌린다'는 말이 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경제발전 전략을 펴는 과정에서 성장한 중산층은 민주화의 든든한 기반이 된다. 또 권위주의 체제의 학교가 민주주의 원칙을 가르친 것이 체제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군부 정권은 초중고 교과서를 통해 서구 자유민주주의 모델을 가르쳤다. 이 같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성장한 뒤 유신체제와 5공화국을 흔드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체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원칙'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다.
원칙의 정치를 가장 강조하는 정치인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이다. 박 전 대표를 '원칙 공주' '원칙 투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원칙 강조는 자신에게 족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세종시 논쟁 때 그랬다. 박 전 대표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원칙론을 내세워 절반 가량의 행정부처를 세종시로 옮기자는 원안을 관철시켰다.
한나라당 신주류의 원칙 파기
의사결정 과정에서 원칙 준수와 효율성 추구가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원칙 준수의 관행을 하나하나 쌓아갈 필요가 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당성과 원칙을 지키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하다. 여야가 틈만 나면 몸싸움을 하는 것도 양측에 의해 국회의 기본 원칙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정치를 반 단계라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는 원칙의 정치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요즘 한나라당에선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쇄신의 깃발을 내건 신주류에 의해서다. 친박계와 소장파의 연합군으로 구성된 신주류는 7∙4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계속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전당대회 룰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는 폭거를 저지른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한나라당이 지난달 초 소집한 전국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전국위원은 전체 741명 중 164명에 불과했다. 경선 득표 집계 방식과 관련, 여론조사를 30% 비중으로 반영할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친박계인 이해봉 전국위원회 의장은 사회를 보면서 회의에 불참하고 위임장을 제출한 266명의 의견을 의장 자신의 의견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선거인단 21만명 투표 70%와 여론조사 30% 반영' 등의 경선 룰을 담은 당헌이 통과됐다. 당시 "초등학생 회의도 그렇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한나라당은 당나라당임을 보여줬다"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신주류는 "정당 관행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 묵살했다. 그러나 법원은 전국위에서 개정된 당헌에 대해 효력정지 결정을 내렸다. 결국 한나라당은 2일 전국위를 재소집해 경선 룰을 재의결했다. 정당사에 유례가 없는 해프닝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1만명의 선거인단 명부에 엉터리 명단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선거인단 명단 중에는 주소나 전화번호 등이 잘못돼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 20~30%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망하거나 탈당한 사람이 선거인단 명부에 포함된 경우도 있다. 만일 경선 개표 결과 1, 2위의 득표 차이가 5% 이내인데, 투표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지 못한 대의원이 10% 를 넘는다면 선거무효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원칙 투사' 박근혜, 한마디 해야
불공정 경선 논란도 벌어졌다. 경선 과정에서 '일부 후보의 공천 협박설' '친이계의 특정후보 조직적 지원설' 등이 제기돼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진흙탕 싸움이 전개됐다. 쇄신을 외치면서 반칙을 저지르는 일이 계속된 셈이다. 때문에 엉터리 전당대회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원칙의 정치를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우는 박 전 대표는 원칙 없이 치러지는 전당대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번에 전당대회 준비를 주도한 신주류에 대해 분명한 한마디를 할 수 있을까.
김광덕 정치부장 kd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