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계열사 핵심경영진들을 불러 모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한 편의 비디오를 보여줬다. 금형 불량으로 플라스틱 조립부품의 접촉면이 맞지 않자 삼성 직원들이 튀어 나온 부분을 칼로 긁어내는, 동네 수리점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 이 회장은 그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었다.
18년이 지난 삼성엔 매서운 바람이 감돌고 있다. 삼성 임원들은 "93년 신경영 때보다도 조직 내 긴장감은 훨씬 팽팽하다"고 말한다.
재계가 최근의 삼성행보를 두고 93년을 떠올리는 건 이 회장이 직접 전면에 나서고 있어서다. 우선 한남동 자택(승지원)에서 보고받던 오랜 관행을 깨고 지난 4월부터 서초동 사옥으로 출근하고 있는 것, 더구나 사무실에 나오는 빈도가 더 잦아졌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 관계자는 "조직의 긴장 측면에서 볼 때 회장이 사무실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출근집무는 대대적 사정으로 이어졌다. 이 회장은 "깨끗했던 조직문화가 훼손됐다" "그룹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했고, 전 계열사에 대한 초고강도 감사 속에 삼성테크윈 CEO 등 계열사 고위임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쇄신' 태풍은 마침내 사업연도 중 경영진 교체라는 초유의 인사로까지 이어졌다. 삼성은 연말ㆍ연초 인사관행을 깨고, 1일 전격적으로 삼성전자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LCD담당 사장이 실적부진 책임을 지고 경질됐고, 메모리ㆍ비메모리반도체 및 LCD부문을 통합하는 조직개편과 함께 권오현 반도체사업부사장이 총괄사장으로 임명됐다.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에는 김종중 삼성정밀화학 사장이, 삼성정밀화학 사장에는 성인희 삼성인력개발원 부원장이 선임됐다.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에서 연중에 조직을 개편하고 경영진을 교체하는 건 비상시에나 가능한 일"이라며 "단순한 문책을 넘어 복합적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는 이 모든 움직임을 하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 이 회장의 출근집무에서 강도 높은 '부패 척결' 발언, 대대적 사정, 그리고 잇따른 계열사 최고경영진 교체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회장의 경영복귀와 미래전략실 신설,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의 퇴진과 김순택 미래전략실장 선임까지, 최근 수개월에 걸쳐 진행된 삼성의 모든 긴박한 변화는 서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한 소식통은 "신경영에 비유되는 가히 '뉴삼성' 개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경영복귀 이후 삼성 내 곳곳에서 '누수의 징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최고라고 자부했던 삼성의 휴대폰이 애플에 당하는 것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안다"면서 "여러 차례 위기론을 언급했지만 정말로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애플쇼크'가 단순히 기술적 잘못에서 온 것이 아니라 결국은 기강 해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본인의 부재기간 '관리의 삼성'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허점이 생긴 것을 발견하면서 전면적인 조직 쇄신, 그 중에서도 인적 쇄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환경, 복수노조 허용 등에 따른 노사관계의 급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는 반(反)대기업정서 등도 삼성으로선 위협으로 받아들일 만한 대목이다. 더구나 삼성은 그 무엇보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안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조직 기강 확립과 인적 교체 요구는 어느 때보다 높은 게 사실이다.
현재로선 삼성의 쇄신바람이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 누구도 예단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93년 신경영 작업도 수년에 걸쳐 진행된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긴장국면이 '한철 태풍'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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