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내내 모두 비와 더불어 지내고 있다. 장맛비이다. 잠시 개었다 흐렸다 되풀이하면서 무겁고 습습한 공기 걷히지 않는다. 어둡고 답답하다.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시간을 유별하게 좋아하는 나로서는 건너기 힘든 시간에 처했다.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날의 바깥 바라보기, 햇빛 속에 몸 들어앉혀 있기를 좋아하는데 왜 그런가는 나도 잘 모른다. 모르는 대로 그 이유를 이렇게 들어볼까 한다.
햇빛이 너무 투명한 날은 미술의 극사실주의의 그림보다도 더 극사실 같은 어떤 정서상태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극사실주의란 물적 대상에 대한 주관과 해석을 억제, 일절 배제하고 현실을 극단적으로 생생하고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미술의 한 경향을 말한다. 이런 그림을 책으로 보고 있으려면 오히려 사실(현실)세계가 탈색된 초현실세계를 보는 것만 같다. 육안이 극대화된다 한들 우리의 눈이 사물대상을 전적으로 사실대로 볼 수 있을까. 정밀에 정밀을 더해 입자를 분해하듯 그려 들어가다 보면 빈 공간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물 형해의 어떤 흔적만 어렴풋 대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야기가, 쓰는 나도 모르는 어려운 데로 번졌다. 하여튼 나는 햇빛 속에서 나의 체적이 가벼워지며 진공 속을 유영하는 듯한 정서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걸 이렇게 이해했다. 몽상세계로 들어간 거라고. 몸과 영혼이 해의 빛과 열로 불 때져서 몽상하기 좋게 조율된 거라고. 너무 부신 햇빛 속에 바깥 대상은 지워지고 몸의 어떤 집중된 상태를 감각하는 거라고. 그럴 때 나조차 흔적이 된 듯싶으면서 내면은 내려앉아 고요해지고 사념이 멈춘 듯한 안락함이 오는데, 깊어진 것 같기도 한 이 상태는 사랑 같기도 하다고.
이런 정도로 이해해 놓고는 역시 답을 알 수는 없어 쳇, 누가 시 쓰는 사람 아니랄까봐 놀고 있네 하며 스스로를 좀 비웃기도 했다. 이런 게 다 햇빛 내리는 날의 내 사업인데, 아주 간단하고 쉽게 다른 이유를 대볼 수도 있다. 누구처럼 나에게는 햇빛 알레르기라는 게 없어서 그럴 수 있고, 얼굴 탄다고 햇빛 무서워하는 마음이 둔해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주위에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비 오는 날의 안심과 안정, 그리고 제 속에서 피어오르는 어떤 분위기 때문에 특별한 향의 커피를 내린다고도 하고, 음악을 골라 건다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비 오는 날을 기다리고 비와 더불어 정처없음의 도모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도 나와는 다른 식으로 내면의 고양을 이룰 것이고 그 상태를 사랑할 것이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그들의 또 너무 쉽고 간단한 다른 이유로는 이런 걸 대볼 수 있을까.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해 나는 날이 싫다고. 얼굴이 팽팽하지는 못할망정 햇빛에 노출돼 기미는 끼지 말아야 할 게 아니냐고. 햇빛을 꺼리는 사람들은 집을 구할 때도 햇빛을 덜 받거나 등진 서향, 북향 집인지를 먼저 체크하더라.
두꺼운 검은색 커튼으로 빛이 쳐들어오지 않게 사방을 막아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커튼 다 열어젖히고 온 빛을 받아야 안정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비든 햇빛이든 그런 양쪽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호오(好惡)에 괘념하고 싶지 않다. 비는 그럴 만하여서 비인 것으로 비의 일을 하는 것이고, 햇빛은 그럴 만하여서 햇빛인 것으로 햇빛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알련다. 그 두 세계의 길이가 각기 길든 짧든, 차든 따뜻하든 다 제 몫을 지고 지나가는 자연이고 삶이라고. 전지구적 기후 변화에 우리나라의 이번 장마가 배로 길어져 햇빛 볼 날 어렵더라도 싫어하지 않겠다. 피하고 싶어하지 않겠다.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편히 피하는 일이라는 걸 안 게 얼마 안 됐다. 이 새로 안 앎이 마음에 든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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