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1 2 3 4 5 6 7 8, 이 숫자는 뭘 알려 주는가?". 정답은 "영구(0 9) 어없다"이다. "영구 어없다"는'바보 영구' 연기로 큰 인기를 끈 심형래 씨가 만들어낸 유행어다. 영구는 곧잘 숨지만 남들에게 곧 들키고 만다. 제 눈만 가리고 영구가 없다고 하니 꿩이 숨을 때 고개만 처박고 자기를 못 볼 걸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다.
자기들끼리의 사생결단
6월 30일자 한국일보를 1면부터 2, 3, 4…차례로 읽으면서 이 우스개가 생각났다. 기사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대한 검찰의 반발과 수뇌부 집단 사의, 미흡한 가계부채 대책, 고교 국사교과서 재편 방안, 발표가 두 달 연기된 금감원 개혁안, 정-재계의 대립, 한나라당의 당권 쟁투, 민주당 대표실 도청의혹과 야당의 문방위 점거를 비롯한 국회 갈등….
하나같이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 이런 대립된 진영의 논리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어떻게 매듭을 풀어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현안에서 정작 찾을 수 없는 것은 국민이다. 모든 현안에서 보편타당하고 상식적인 일반 국민의 편의와 이해를 도모하는 시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폭우 피해, 국가대표 출신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는 축구 승부조작, 시한이 다 됐는데도 정하지 못한 최저임금, 대학등록금 등에 항의하는 불법 도심점거 시위 등 즐겁고 기분 좋은 뉴스는 하나도 없다. 전문약의 일반약 전환을 둘러싼 의사-약사 대립은 여전하다. 국민들은 갈수록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물가 인상도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동네물가는 저마다 각각이고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올 줄 모른다. 직장인들은 음식값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반면 식당은 손님이 없다고 울상이다.
어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의 경우,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대립은 국민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이 법의 구체적 사항을 법무부령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정하기로 하자 대검 간부들이 줄줄이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한 반응도 싸늘하다. 의사-약사들의 고질적인 이권다툼에 대해서도 그렇다. 국민을 그야말로 열 받게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저축은행 수사, 현직 때 봐주고 퇴직 후에 안심하고 돈을 받는 사후수뢰 공직자, 국고와 공금이 무서운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공무원, 이런 것들이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각종 갈등의 역기능을 최소화하면서 순기능을 살려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점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갈등은 최종적으로 국회로 수렴돼 국회에서 해결돼야 하지만, 잘 알다시피 국회 자체가 거대한 갈등 양산기제인 판에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러 헌법기관 가운데 현재 그나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국무총리뿐인 것처럼 보인다. 꼿꼿하고 단단한 행정가 정도로만 생각했던 김황식 총리는 의외로 정치력을 발휘하며 일을 처리해가고 있다. 다만 대통령제 하에서의 총리란 원래 한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집단은 어떤가. 사회가 건강하고 성숙할수록 전문가집단의 문제 해결능력과 그들의 기여가 중요하다. 그들을 통해 이해 대립과 견해차가 첨예한 현안에 대한 매듭과 마무리가 지어질 수 있어야 한다. 갈등 조정은 사실 진영 조정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전문가집단의 권위는 여전히 미약하다. 오히려 그들의 도덕성과 정직성이 도마에 오르는 일도 있으니 제 앞가림부터 잘 해야 할 판이다.
전문가 집단이 더 노력을
그러나 어쨌든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전문가 국민'이다. 해당 분야의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전문가집단 스스로 자질 향상과 자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나 공공기관은 전문가집단의 적절한 발전과 운영ㆍ관리를 위해 정성과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회적 기제에 기대기가 어려워 전문가 집단에 이런 주문이라도 해 보는 것이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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