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과 섬 사이 2.5km 노둣길 따라 시간을 건너고…
우실이라는 게 있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다. 우실은 본래 '울실'에서 비롯된 말이다. '울'은 둘레를 에워싸서 지킨다는 의미이고 '실'은 마을의 옛말. 곧 마을을 지키는 하나의 성벽과 같은 것이다.
우실은 유독 신안의 섬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실은 섬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 논밭에 모래가 날아드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이런 실용적인 기능 외에 우실은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단속하는 울타리 역할도 한다. 마을의 실질적인 경계이자 온갖 액과 역신을 차단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 산 자와 죽은 자의 마지막 이별 공간도 우실이었다. 마을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는 틀이자 성과 속의 경계가 바로 우실이다. 단순한 울타리 그 이상인 것이다.
암태도의 송곡리 우실은 돌담이다.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마을이 번창하고 우환을 막으려면 돌담을 쌓아야 한다고 해, 원래 나무로 우실이 있던 곳에 견고한 성곽처럼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높이 2m가 넘는 거대한 돌담이다.
안좌도의 대리 우실은 아름드리 팽나무가 마을을 감싼 모양이다. 그 팽나무 우실의 마을 입구 앞에는 남근석 2개가 서있다. 대리 우실은 액을 막아주는 숲이다. 주민 말로는 마을 뒷산에 여근 형상의 음바위와 음샘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고 해서 그 기운을 누르겠다고 우실로 가리고 또 남근석을 세웠단다. 섬 여인이 정말 바람이 났는지 아니면 살기가 고달파 도망을 갔는지 모를 일이다. 아낙이 도망간 가정과 마을은 이를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을 터. 우실은 어떻게든 섬 아낙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매야 했던 그들의 바람이었을 것이고, 섬 여인들에겐 빠져 나가기 버거운 울타리였을 것이다.
우실이 마을을 가두는 울타리라면 노두는 갇힌 섬과 섬을 잇는 희망의 통로다. 암태도와 추포도 사이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노두가 놓여 있다. 노두는 갯벌 위에 놓은 징검다리다. 물이 빠지면 노둣돌을 디뎌 섬에서 섬으로 넘어 다녔다. 지금은 옛노두 옆으로 차가 다닐 수 있는 콘크리트 포장의 신노두가 놓였다.
2.5km 길이의 옛노두는 이제 다니는 이들이 없어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다. 예전 징검다리 노두만 있던 시절엔 일년에 한번씩 뻘을 치는 일이 마을의 큰 행사였다. 큰 돌덩이들이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 보면 이끼가 끼기 마련. 그 미끄럽게 이끼 낀 노둣돌을 뒤집어주는 작업이다. 돌을 뒤집고 움직이지 않도록 주변에 뻘흙을 돋워주는 작업을 뻘을 친다고 했다. 수 천 개의 노둣돌을 뒤집고 고정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노두가 이어지는 추포도의 딸망섬에는 노두를 놓는 큰일에 돈과 땅을 내었다고 당시 지주들을 기리는 공덕비가 서있다.
안좌도의 두리선착장에는 바로 앞 박지도, 반월도를 연결하는 나무다리가 있다. 한겨울이면 푸른 융단처럼 감태가 덮이는 뻘 위에 설치된 예쁘장한 나무다리다. 차는 다닐 수 없고 걸어서만 다닐 수 있다. 다리 하단엔 두 섬에 물을 대는 수도관이 연결됐다. 1,004개의 섬을 강조하는 신안군에선 1,400m 가량 되는 이 목교의 이름을 천사나무다리라고 지었다. 그동안 물 때문에 애를 먹었던 박지도, 반월도 주민들에겐 천사보다 반가운 다리였을 것이다.
암태·안좌도(신안)=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마을 벽 장식한 김환기 그림들… 소작항쟁의 아픈 기억도
관광객이 묻는다. "이 배 안좌도 가요?"
주민이 답한다. "서서도 가요."
안좌도 가는 배에서 간혹 듣게 되는 우스갯소리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배가 닿는 안좌도의 읍동에 발을 디디면 한전 건물이나 여객선 매표소, 화장실, 창고 건물에 그려진 그림들에 놀라게 된다. 섬마을에 왠 벽화냐 고개를 갸웃거린다면 안좌도가 수화 김환기(1913~1974)의 고향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김환기는 새, 달, 항아리 등의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로, 안좌도의 자랑이다. 읍동리의 민가 담벽과 선착장 창고, 화장실, 옛 정미소 건물에 화백의 그림들을 본딴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마을 전체가 김환기 미술관인 셈이다. 실제로 이곳엔 김환기 미술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김환기의 어머니가 오색깃발 펄럭이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생가가 잘 보존돼 있다.
자은, 암태, 팔금, 안좌, 이 4개의 섬을 다 돌아본 후 암태도의 오도선착장에서 압해도 송공선착장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뒤돌아 보니 오도 선착장 뒤에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즐비했다. 맷돌바위란 이름의 기암은 커다란 바위 대여섯 개가 일부러 쌓은 듯 포개져 묘한 자태를 뽐낸다. 맷돌 같기도 하고,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엠블렘에 그려졌던 이눅슉 석상을 닮은 듯하다.
맷돌바위 바로 옆에는 고릴라의 옆 얼굴을 옮겨다 놓은 듯한 고릴라 바위가 있다. 이들 기암을 이어 만든 3.5km 오솔길이 오도선착장 위 등대를 지난다. 뱃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한 바퀴 돌며 암태도의 기암 절경을 만끽하는 것도 좋겠다.
암태도는 일제강점기 소작쟁의 운동으로 알려진 섬이기도 하다.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이 감소하자 지주들은 소작료를 8할까지 올려 벌충하려 했다.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한 농민들은 당시 암태도 대지주인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논 4할, 밭 3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지주는 이를 묵살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동맹을 벌이고 지주 아버지의 공덕비를 부쉈다. 소작인에 대한 지주 측의 잇단 악행과 지주 편을 드는 일본 경찰에 격분한 농민 400여 명이 목포로 가 농성과 단식투쟁을 벌여 결국 소작료를 4할로 내린다는 약정을 받아냈다.
이후 항일운동으로 수 차례 옥고를 치른 서태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신안 압해도의 논둑길에서 벼 포기 한 줌을 움켜쥔 채 죽었다고 전해진다. 암태면사무소 인근에 소작인항쟁기념탑이 서 있다.
안좌·암태도(신안)=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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