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습식식각(반도체를 화학물질에 담가 필요 없는 부분을 제거) 작업을 해 오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3월 2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 황모씨. 서울행정법원이 23일 황씨의 사인이 업무와 관련 있는 산업재해라는 판결을 내리기까지 황씨의 유족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승인을 청구한 뒤 1년8개월을 기다렸으나 2009년 2월 산재가 아니라는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해 또 불승인 판정이 받은 것은 또 9개월이 지나서인 2009년 11월. 이들은 결국 법원의 판단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산재가 인정된 것은 황씨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3개월이 지나서였다.
이 기간 황씨 유족들이 겪은 고통은 산재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는 산재 관련 제도 문제점들의 축약판이다. 까다로운 산재 인정기준, 노동자에 대한 입증책임전가, 복잡한 사전승인절차 등이 그것이다. 황씨의 소송을 지원했던 시민단체 '반올림'관계자는 "많은 산재피해자들은 피해 신청을 어디다 하는지조차 잘 모른다"며 "하물며 산재 피해자가 직접 주치의 소견, 치료 후 업무복귀 여부, 정규직 여부 등 복잡한 사항을 적어 사업주의 날인까지 받아 산재 신청을 하도록 한 규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27일 참여연대, 노동건강연대 등 시민단체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산재보험법 토론회'에서 산재인정제도의 문제점과 쇄신방안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제안이 쏟아졌다. 소송 청구인 5명중 2명만 승소한 이번 백혈병소송 결과가 보여 주듯 업무상 질병의 판정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산재보상법에 따르면 현재 업무상 질병은 23종. 이는 60종이 넘는 직업병을 인정하는 독일, 50종이 넘는 직업병을 인정하는 일본에 비하면 턱없이 까다롭다. 가령 현재 산재보상법에서는 벤젠 1ppm 이상의 농도에 10년 이상 노출돼 백혈병에 걸렸을 경우만 업무연관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법원은'노출수치가 낮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벤젠에) 노출될 경우'나, '벤젠 등 노출이라는 요인과 상관없는 경우'도 모두 업무와 연관성이 있는 백혈병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올림'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직업성 암 발생 (6,400여건)중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인정은 7건으로 승인율 0.1% 수준이다.
최근에는 단순사고성 산재보다 업무상 질병(뇌심혈관질환ㆍ근골격계질환)의 산재신청이 증가하고 있지만 산재승인율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는 현행 제도의 문제점도 제기됐다. 2000년 산재승인율이 79.2%였던 뇌심혈관계 질환의 경우 2007년 40.2%까지 떨어졌다. 2005년 산재승인율 41.4%였던 심근경색증은 2007년 28.0%로 낮아졌다. 노동계에서는 이와 관련 ▦사용자에게 산재입증 책임부과 ▦선(先) 산재 승인 후(後) 산재판정 ▦화학물질 사전예방원칙(안전하다고 증명되기까지 위험한 것으로 간주)도입 등의 방향으로 관련 법과 제도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재계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팀 관계자는 "사용자의 산재 입증방식은 1970년대말 스웨덴에서 도입했다가 산재보험재정 고갈로 90년대초 폐지한 정책이고, 선 산재 승인도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고용부 산재보상정책과 관계자는 "올해초부터 전문가들로 이뤄진 TF에서 산재인정기준 완화, 판정절차 개선 등을 논의하고 있다"며 "산재보험의 문턱을 낮추는 문제는 건강보험 등 다른 사회보험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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