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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욕망 vs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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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욕망 vs 소망

입력
2011.06.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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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앙대 의대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준 학장 축사의 한 대목이다. "죄송하지만, 졸업생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 잠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생화학을 수강한 학생만이 알고 있는 내용인데, 약 3년 반 전의 강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졸업생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뜸을 들이고) 그러나 생화학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비어있는 괄호에 관한 이야기, 기억하고 있나요?"

의학부와 간호학과 학생들에게 나의 마지막 수업에 연이어 항상 소개하는 이야기가 있다. P는 영국에서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했고, 세속적 안락함의 기득권을 포기한 채 1966년부터 약 15년 동안 마산 결핵요양원에서 이국(異國)의 삶을 살았다. 1990년대 분쟁이 극심했던 알바니아에서 P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던 한국 의사 부부가 전투를 피해 소개(疏開)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잠시 영국을 방문해 P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대화가 무르익는 가운데 P는 후배 의사와 의학도에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긴다고 얘기했다. "Only one life, it will soon be passed: Only what's done for ( ) will last. 오직 한 번뿐인 인생, 그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오직 ( )을 위해 행한 것들만이 지속될 것이다."

인간으로서, 또 의사로서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배가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가운데 후배들을 격려하는 속 깊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P는 본인이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단어로 괄호 안을 채워놓았고, 오늘도 그 뜻의 온전함을 지향해가고 있다. 만일 위의 말이, 중년 혹은 20ㆍ30 대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의 말이었다면, 아직 인생을 충분히 겪어보지 못한 풋내기의 넋두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의 주체가 그 내용의 격을 다르게 함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일생을 통해 괄호 안에 어떤 단어가 채워지기를, 어떤 단어로 채우기를 소원하느냐?"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잠시 침묵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도 갖는다.

졸업식에서는 괄호를 채워 나가는 삶에 대한 간곡한 부탁에 이어 괄호는 '너와 나' 우리에게 남겨진 평생의 숙제라는 말로써 축사의 한 대목을 정리했다.

심심찮게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약학, 한의학, 의료계의 일탈과 이들 사이의 다양한 갈등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다른 세상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 사람으로서, 직업인으로서 간직하고 싶은 꿈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만을 위한 욕망이 아닌, 우리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소망 속에서 그 단초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선생님 자격을 구비해 선생님이 되고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요즈음, 빈 괄호는 선생이라고 명함 박고 다니는 내게 주어진 특별한 여지(餘地)다. 언젠가 이 세상 순례의 길을 마치는 순간, 비로소 괄호 안에 완성된 단어를 채워 넣으며 인생 여정의 흔적, 숙제를 감사함으로써 마무리하고 싶다.

참, P와 한국 의사ㆍ의학도와의 교류는 여전하다. 또 이야기 속의 한국인 의사는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2010년 1월14일 선종)과 함께 2009년 12월 17일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을 공동 수상했고, 지금도 알바니아에 살고 있다.

백광진 중앙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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