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엔 치마만 입어도 공장이 난리" 화학·철강 엔지니어 女風당당
"에머랄드 빛깔의 손톱이 눈에 띄네요. 공장에서 일하는데 그렇게 칠해도 되나요"기자의 첫 질문은 손톱 장식에 관한 것이었다. 머릿속에 그렸던 화학 공장 여성 엔지니어의 막연한 모습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 "현장에서는 장갑을 끼니까 괜찮아요. 기분 전환도 하고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걸요."
올 1월 입사한 심슬기(23)씨는 삼성토탈 충남 대산공장의 현장 직원 중 막내이다. 전남대 전기공학과를 나온 그는 삼성토탈 24년 역사 상 첫 공무(공장 내 설비ㆍ시설 보수 유지) 담당 여성 현장 직원이기도 하다. 삼성토탈 관계자는 "국내 화학 공장 공무담당 현장 직원 중 여성은 심슬기씨가 처음으로 안다"고 말했다.
심 씨의 입사가 가져온 변화는 생각 이상이다. 120명 가까운 남성 공무 담당 직원 중 처음엔 그에게 선뜻 악수를 건넨 이조차 없었다고 한다. 심씨는 "여성과 한 공간에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고들 해요"라며 "남자 동기하고만 대화하던 분들도 이제 먼저 다가와서 이런저런 말을 건네요"라고 말했다.
기자와 심씨의 대화를 보고 있던 오송희(27) 주임(원료생산사업부)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심씨는 서울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2007년 회사에 들어 온 입사 5년 차 엔지니어. 공무부문과 달리 생산부문에서는 2006년부터 여성 엔지니어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오 주임을 포함해 5명의 여성 엔지니어가 있. "처음엔 치마만 입어도 공장이 난리가 났다"는 오 주임은 "지금은 예전만큼 떠들썩한 반응은 없다"고 전했다.
여성 엔지니어로서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남성, 여성의 차이를 두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대부분 공정이 자동화해 있고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남녀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것.
오 주임은 "대학 동기 중 생산현장의 엔지니어를 택한 사람은 나 혼자"라며 "기술고시 등 고시 공부를 하거나 대학원, 연구소 등 연구직으로 가는 동기들을 보고 내가 잘하는 걸까 하는 걱정도 많았다"고 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지금 오 주임은 "확실히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업무로 볼 때 여성이기 때문에 못할 것도 없고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섰다"고 말했다.
두 사람처럼 화학, 정유, 철강, 조선, 중공업 등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산업 분야에서 여성 인력은 아직까지 소수. 일부 회사들이 1990년대에 여성 인력을 채용하긴 했지만 대부분 사무 인력들이었다. 엔지니어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여성 인력을 뽑은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삼성토탈 관계자는 "공정이 점점 복잡해지고 힘보다는 기술력이 더 중요해지면서 현장에서 섬세함과 꼼꼼함을 갖춘 여성 인력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며 "갈수록 여성 엔지니어의 활약이 활발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생산가능 인력은 줄어드는 추세. 25~49세의 핵심생산인구는 지난 해 현재 1,953만 명으로 5년 전보다 36만명 가량 감소했다. 핵심생산연령층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건국이래 처음. 이런 추세는 가속화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데 더 이상 남성만으론 경제와 산업의 지탱 자체가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사무직이나 소프트웨어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제조업도 여성 인재를 발굴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공장을 돌릴 수 없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과 달리 여성인력 활용을 위해선 육아나 보육에 대한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며 "지금까지는 기업들이 이런 부분을 비용으로 인식해 여성채용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였지만 앞으론 좋든 싫든 여성을 써야 하기 때문에 폭넓은 투자가 이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김희(41) 슬라브정정(철강 반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중간 공정) 공장장은 철강업계 첫 여성 엔지니어로 부장급이다. 그가 1990년 포스코 대졸 여직원 공채 1기로 철강업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여성이 과연 철강을?'이라는 물음표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제철소에 첫 출근을 해 들은 웅장한 소리는 마치'운명 교향곡'처럼 가슴을 쿵쿵 때렸다"며 그 때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남성 직원 150여 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김 공장장은 "퇴근 후 두 딸을 만날 때까지 하루 종일 보는 건 남자들 뿐"이라며 "공장의 다수는 남성이고 그 남성의 특성을 빨리 파악해 이를 충분히 이해하려 애쓴 점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이라고 했다. 그는 남성 동기를 포함해 동기 중 가장 빨리 승진했다.
김 공장장은 "여성은 일의 과정을 중시하고 구성원과 함께 호흡하려 한다"며 "반면 남성은 결과를 중시하고 조직 안에서 경쟁을 즐기는데 특히 대부분 군대를 다녀오고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터라 이런 분위기는 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4학년 두 딸이 있다는 그는 "여성 엔지니어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다행히 같은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 늘 기꺼이 나눠 하고 두 딸도 엄마를 이해해 줘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대산=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女 임원들 응원 댄스의 힘…신나고 부드러운 직장으로
"이 맛이 아니야. 건강음료라도 맛이 있어야 합니다."
제품 하나하나의 맛을 손수 봤다. 그리고 음료 재료에 산수유, 말린 자두인 푸룬, 복분자를 추가했다. 식초 분위기가 나던 병 디자인도 진짜 음료수처럼 확 바꿨다. 샘표의 대박 상품인 마시는 건강발효 흑초 '백년동안'은 이렇게 햇빛을 보게 됐다.
샘표식품 서동순 이사. 샘표는 2006년부터 마시는 벌꿀흑초, 매실흑초를 잇따라 시장에 내놓았지만 소비자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3년 뒤인 2008년'간장만 팔자'며 사업을 접으려 했다. 이 때 당시 부장이던 서 이사가 임원진을 설득한 뒤 직접 나섰다. 샘표 관계자는 "그가 감별사처럼 맛을 보는 모습에 여성의 섬세함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게 됐다"고 회상했다. 2009년 출시된 백년동안은 지난해 매출 250억원에 이어 올해 6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샘표는 창립 65년 만에 처음으로 올 4월 그를 여성 임원으로 발탁했다.
KT 여성임원들은 지난해 7월 한달 간 신나는 일터 만들기 캠페인을 위해'걸그룹 올레'를 결성했다. 당시는 남아공 월드컵의 여운이 남아있던 때. 월드컵 기분도 낼 겸 붉은 악마 셔츠와 뿔을 쓴 여성 임원들은 근무시간에 회의실과 사무실 가릴 것 없이 불쑥 불쑥 나타나 당시 유행하던 황새춤을 췄다. 한 때 공기업이었던 탓에 사내 분위기가 보수적인 KT 내부엔 어색함이 흘렀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정장 차림을 한 KT 남성 임원들도 권위를 내려놓고 동참, 춤을 추기 시작했다.
KT의 한 직원은"표현명 사장을 비롯해 박수치며 함께 춤추던 임직원들을 보면서 이 것이 부드러운 여성의 힘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KT의 여성 임원은 총 8명. 전체 임원의 7.3%로 대기업 중 높은 편이지만 KT는 지속적으로 여성 임원을 늘려갈 계획이다.
여성 임직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함을 앞세워 사내 분위기를 일신하는가 하면,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는 제품ㆍ서비스 개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국내 주요 기업들도 여성 채용규모를 늘리고. 유능한 여성인재를 임원으로 내세우고 있다.
포스코가 대표적인 케이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지난해 10월 한 강연에서 "포스코는 현재 남성 중심의 회사에서 벗어나 직원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정 회장은 도전적 환경에 놓여 있는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변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포스코는 최근 여성 임원으로 오인경 상무를 발탁하고, 스테인리스 마케팅실의 그룹장으로 여성인 양호영씨를 임명했다.
GS도 그룹 차원에서 여성인력의 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정유회사인 GS칼텍스에도 최근 여성인력이 부쩍 늘고 있다. 2005년 이래 대졸 신입사원 중 여성 비율이 꾸준히 20%를 상회하고 있고, 대리급 직원 중 여성은 30%에 달한다.
재계 관계자는 "감수성이 높은 다재다능한 여성인력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이들의 역량을 기업 경쟁력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채희선기자 hsch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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