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 일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까 김민정 시인은 연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고 ‘죽지마’ 이렇게 말한대요.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 하늘 아래 함께 있어만 준다면 그대가 어떤 꼴로 있어도 좋으리… 이런 도저한 고백처럼 들렸어요.
팬티 바람의 노숙자와 둘이 있는 밤늦은 역사에서 봉변당할까 두렵기도 하련만 시인은 태평하게 캔 커피를 뽑아 듭니다. 물론 휙 지나가는 파출부 직업소개소 전화번호가 파출소 번호로 보인 걸 보면 잠깐 무섬증을 느낀 것도 같아요. 그렇지만 이어지는 ‘여성부’를 봄을 노래한 다른 시인의 이름으로 고쳐 읽으며 시인은 따듯한 캔을 만져봅니다. 하늘 아래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꼴이, 그저 살아 있어 줘서 다행인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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